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5월 초에 3권짜리 두툼한 장편소설을 읽었다. 제목은 <사할린>이라 적혀 있었는데, 일면식도 없는 원로 작가의 소설이었다. 소파에서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그만 한밤을 꼬박 새우고야 말았다. 이 소설은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던 일제 말기 경남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위안부와 노무자로 사할린에 강제연행된 후 그곳에서 겪는 여러 형태의 식민지적 참상을 조명하고 있다. 해방을 전후로 사할린과 경남지역에서 일어난 여러 참극들, 이를테면 소련군의 점령 이후 일본인들은 고국으로 귀향하지만, 조선인들은 무국적자로 처리되어 사할린에 남게 되면서 초래된 일련의 역사적 고통들, 해방은 되었지만 일제하 민족운동에 대한 박해가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뒤틀리고 비화되어 억울하게 희생되어야 했던 역사적 상황 등이 날카롭게 교직되고 있다. 사할린과 경남지역을 인물 시점으로 왕복 서술하면서 전개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일제 말기로부터 소련과의 수교가 이루어진 1990년대까지 사할린 조선인 동포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조국 귀환에 대한 열망과 좌절을 확인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책읽기를 수반했다. 일제 말기의 조선문학을 검토해 왔으면서도, 또 여러 일본어 문헌들을 통해 식민지기 조선인 문제를 탐구해 왔으면서도, 사할린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상 무지 상태였던 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다. 총체성이 중요한 것이다. 이 소설은 애초에 <먼 땅 가까운 하늘>이라는 제목으로 1996년에 출간된 것을 이번에 제목을 바꿔 재출간한 것이라 한다. 나 자신이 과문한지는 몰라도 현장비평계에서 이 소설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적 논의는 없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일상성과 욕망을 주로 묘파했던 1990년대 주류 문단의 경향 속에서, 일단 이 소설의 중요성이 간과되었을 확률이 높다. 동시에 이 소설의 작가가 주로 부산경남지역에서 활동했고, 소설의 초판본이 서울의 주류 문학출판사에서 출간되지 않은 데도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이 소설이 재출간된 이후의 보도기사를 검색해 보면, 지역일간지는 자못 비중 있게 보도했지만 중앙일간지에서는 전혀 조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서울중심성의 문제가 여러모로 이 소설의 망각에 기여한 게 아닐까. 나와 같은 문학평론가에게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압도적으로 출간되는 작품들을 전면적으로 검토한다는 것은 물론 힘에 부치는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문학적 징후를 드러내는 작품의 경우 예민하게 포착하고 성실하게 비평적 조명을 가해야 하는데, 나 역시 서울중심주의 혹은 주류 문단의 문학출판 관행에 알게 모르게 익숙했던 게 아니겠나 하는 반성도 해 보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가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작가인 이규정은 이 소설을 ‘현장취재 장편소설’로 규정하고 있다. 작가가 사할린에 대해 관심을 둔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라고 하는데, 당시는 미-소 냉전 상황이자 한국과 소련 역시 미수교 상태였으므로, 일본 등의 자료를 통해서만 우회적으로 사할린 문제를 탐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에 비로소 사할린을 직접 방문 취재해 이 소설의 서사적 골격과 디테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데, 소설의 시공간과 중심사건을 끈질기게 탐구하고 장악하려는 열정의 지속은 존중할 만하다. 소설도 재발견하고 역사도 재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오랜만에 경험한 뜻깊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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