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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병익 칼럼] <무정> 100년

등록 2017-06-08 18:14수정 2019-10-17 16:33

김병익
문학평론가

묵은 것들 정리 중 툭 떨어진 것이 오래전의 기사 뭉치였고 펼쳐본 그 첫 스크랩 제목이 ‘<무정 이후> 소설문학 50년’이었다. 아항, 이런 기사를 쓴 적 있었지, 기억이 떠오르면서 납활자로 인쇄된 그 작은 글자들을 새삼 다시 읽었다. “춘원 이광수의 <무정>이 매일신보에 발표된 것이 1917년. 올 1967년으로 꼭 50년이 되었다.” 이 스크랩은 그해 7월29일치 <동아일보>로 적혀 있었다. “춘원 문학에서 최초의 장편인 <무정>은 곧 신소설과 구별되는 우리 현대문학에서의 최초의 소설. 따라서 한국 소설문학은 꼭 반세기의 나이를 먹었다.” 이렇게 특집으로 기획된 <무정> 50년 기념 기사에서 앙케트를 받은 41명의 문학인은 문제작 10편으로 <날개> <무녀도> <무정> <메밀꽃 필 무렵> <감자> <비오는 날> <삼대> <북간도> <광장> <동백꽃> <서울 1964년 겨울>(10위가 동점)을 꼽았고 작가로는 이광수, 김동인, 김동리, 염상섭, 이상, 황순원, 이효석, 손창섭, 최인훈, 안수길을 올렸다.

이광수의 <무정>에서 시작한 한국 현대문학 1세기를 맞는 올해, 그런데 그에 대한 의미 있는 행사나 회고, 비평과 토론이 없다는, 상당히 쓸쓸한 소감을 가지며 이 목록들을 되짚어보았다. 단편(집)이 6편으로 장편소설의 취약성이 돋보였고 해방 이후 20년 동안 등단한 작가는 단둘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조사하더라도 이제라면 엄청 다른 결과가 나오리라. 50년 전의 작품과 작가 명단에는 당시의 반공주의로 좌파 문학과 월북 작가들이 제외되어야 했고 친일 행위에 대한 작가 비판은 대체로 온건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이제라면 훌륭한 작가들이 숱하게 배출되었고 그들의 뛰어난 창작과 그에 대한 연구, 독자들의 수용, 문화 전반의 향상과 국제화 경향으로 그 선호와 평가도 상당히 바뀔 것이다. 이 특집에 이어 서른 안팎의 젊은 비평가 5명이 ‘한국소설문학 50주년 기념 평론’을 연재했고 그 시리즈의 마지막이 리얼리즘을 제창하는 백낙청의 글이었다는 것이 기억된다. 이듬해 1968년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의 신시 60주년을 기하여 문학·미술·음악 등 예술 전반의 ‘근대문화 60주년’ 기념행사와 세미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것은 한말과 주권 상실기에 일기 시작한 우리 근대 문화와 예술에 대한 폭넓은 회고와 성찰, 축하와 평가의 진지한 작업이었다.

<무정>과 이광수에 대한 내 사사로운 회상을 좀 더 계속하고 싶다. 60년대 후반 박정희 시대에 제기된 근대화 작업에 따라 근대란 무엇인가, 그 방향은 서구적 근대성인가 우리 나름의 독자적인 근대화인가, 그것들을 어떻게 모색할 것인가의 잇단 논의가 요구되었고 그런 가운데 그 길목에 선 이광수에 대한 재평가도 진행되었다. 이때의 이광수는 근대문학의 창시자 혹은 한국문학의 최고 문호라는 관행적 평가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미 임종국은 친일문학의 대표로 그를 혹독하게 비판한 바 있었고 송욱과 김붕구, 정명환과 이상섭, 김윤식과 김현의 비평들은 이광수와 <무정>에 다각적인 시선으로 접근했다. 그것은 이광수의 내면과 정신의 취약성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무정>의 소설 구조가 보인 약점 분석에 이르기까지 광범했다. 나는 <문단 반세기>(1973)를 연재하면서 예외적으로 이광수에 대해서만 2회를 들여 그의 ‘변절 행위’와 그의 ‘훼절의 여운’을 다루었다. 45년 전의 나는 이광수의 작품 비판보다 그의 친일 행위를 더욱 혹독하게 비난했는데, 이는 유신 시대 지식인들의 ‘곡학아세’ 경향에 대한 우려와 내 반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기사를 본 이광수의 딸 이정화씨가 미국에서 긴 편지를 보내 자상한 자기 아버지가 생전에 보여준 애국심을 회상하면서 내 가혹한 비판에 항의했다. 나는 그녀에게 해명의 답장을 썼고 그녀가 잠시 귀국했을 때 만나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김현) 춘원의 존재와 그 상황에 대해 동정하지만 그의 변절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에 대한 평가가 가혹해야 했던 것은 ‘민족의 사표’로 존경받는 분의 훼절에 대한 실망이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탄압을 관련시켜 당시의 지식인과 문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하는 내 말에 그녀는 순순히 이해하는 태도였다. 그녀와의 이런 교감은 그해 가을에 쓴 내 에세이 <작가와 상황>에서 문학인과 지식인들이 당대의 억압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술회되었다.

이광수의 훼절에 대해서는 심각했지만 나는 그의 문학에 호의적이고 특히 <무정>이 품은 의미를 평가하며 김철 교수의 <무정> 텍스트 비평에 대한 수고에 경의를 보낸다. 김철은 일본의 대학도서관에 묻혀 있는 회동서관판 <무정>(1925)을 보고 충격을 받고 서지비평을 통해 그 원전 복원에 진력한다. 그는 대학원생들과 이 소설이 처음 발표된 <매일신보>의 연재작을 저본으로 1995년의 동아출판사본까지 중요한 판본들을 비교 검토하면서 원본 확정에 노력했다. 그것이 <바로잡은 무정>(2003)의 760쪽 큰 책이다. 김 교수는 1917년의 연재본과 그 이후 시기와 출판사를 달리한 8개의 판본을 대조하고 변화와 변조(오류까지)의 힘든 비정(批正) 작업을 감당하며 그동안 우리 문학사의 첫 장편소설의 어휘와 철자, 띄어쓰기 등의 변천 과정을 말끔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무정> 출판의 역사이자 우리말의 어휘, 표기, 문체 등 문자생활과 그 문화의 역사로 확장되어 한 세기 동안 우리 말과 글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그 변화의 궤적을 한눈으로 보게 한다.

여기서 나는 ‘<무정> 100년’의 기념을 위해(혹은 대신하여) 오래전부터 품은 내 희망을 밝히고 싶다. 한말 즈음부터 식민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사회학자 송호근의 소설 <강화도>에서 이르는 바 ‘화이(華夷) 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동아시아권의 문자문화도 한자에서 탈피하여 각각의 표현체제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일본은 한자와 가타카나·히라가나를 병용하고 몽골은 키릴문자로 바뀌었으며 베트남은 한자의 4성을 병기한 알파벳을 사용하고 중국 스스로도 백화문체로 변혁하면서 간자체로 간소화했다.

북한은 해방과 동시에 한글 전용을 선택했고 우리나라도 강제된 일어 사용에서 해방 후 한글-한자 혼용으로 바뀌고 이어 한 세대 전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문자와 그 표기법, 문체와 표현, 기표와 기의의 일치(/불일치)들이 품은 변화는 문화와 그 정신, 그리고 정치 사회의 의식 변화도 내장하고 있어 한자문화권의 해체 과정에 대한 비교 보고는 곧 나라마다의 근대화 과정을 겪는 민족사적 내면을 드러낼 것이다. 나는 관련국들의 보고를 통해 동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 과정에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 정치문화사를 대조해보고 싶은 것이다.

더불어 나는 ‘<무정> 1세기’ 곧 한국문학 100년에 대한 기념과 성찰을 통해 우리 신문화의 진전 과정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를 바란다. 친일과 좌경의 부정적 자의식을 넘어 자기 긍정의 자신감으로 반성하며 콤플렉스 없는 새로운 세대의 신선한 시선으로 분석하고 자유롭게 열린 정신으로 평가하며 그 의미를 찾을 때 우리 문학과 문화도 그만큼 높고 넓어지며 의미 있고 풍요해질 것이다. 오늘의 우리 자신의 존재감을 향한 자부심도 든든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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