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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다들 그렇게 살잖아요 / 김남일

등록 2017-05-30 18:33수정 2017-05-30 19:02

김남일
정치팀 기자

“금리도 싸고 물가는 오르는데 예금을 하나? 이게 어떻게 투기가 되나?”

인사검증 과정에서 위장전입이나 부동산 투기 논란이 벌어질 때면 2005년 2월에 들었던 이 말이 생각난다. 오들오들 떨며 서울 한남동 고급주택가 골목에서 뻗치기를 하다, 해 진 뒤 귀가하는 이헌재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에게서 이런 구박을 들으면서도, 말 한마디 건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지며 소주 생각이 간절했었다. 이 부총리는 나름 억울한 경우였다. 1979년 여윳돈을 가진 이들의 보편적 욕망은 저축에 있지 않았으니까. 부인이 위장전입으로 땅을 산 것은 맞는데 투기성은 약했으니까. 그때 곱은 손으로 마구 갈겨쓴 취재수첩을 다시 찾아봤지만 이 부총리의 억울함까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는 임명 1년여 만에 옷을 벗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다.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어떤 출발점에서 출발해 삶의 궤적을 그려왔다. 문제가 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국민에게 거북한 소리가 되겠지만.” 한 달쯤 뒤 당시 홍석현 주미대사는 요즘 같으면 경을 열두번도 더 쳤을 ‘숟가락 출발론’을 워싱턴 특파원들에게 설파하고 있었다. 홍 대사 일가는 1979년부터 위장전입을 통해 땅을 사들였다. 1979년이라는 해의 욕망은 위장전입과 땅이라는 어떤 보편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였다. 새 구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홍 대사 스스로 선택한 출발지가 아니었을 그의 붉은 황토밭을 헤매다 발이 푹 빠졌다. 청와대는 “검증 과정에서 투기 목적은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부적격 요인으로 보지는 않았다”고 했다. 홍 대사는 석 달 뒤 터져나온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통령이 5차례 위장전입 전력을 자랑했던 이명박 정부에서는 인사청문 대상자가 늘어난 만큼 위장전입도 풍년이었다. 자녀 교육용 위장전입은 대통령 얼굴을 봐서 면책사유가 됐다. 한상대 검찰총장 후보자는 두 딸이 중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위장전입을 했다. 청와대는 “강북지역이고 자녀 교육 목적이어서 큰 문제는 아닌 것으로 판단”했고, 여당은 “학구열이 높던 때 그렇게들 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한 여당 의원은 그즈음 위장전입으로 처벌받은 일반인이 4명에 불과하다는 기가 막힌 변론을 폈고, 이들을 기소했던 검찰은 뒷목을 잡아야 했다. 앞서 천성관·김준규 검찰총장 후보자도 자녀 취학 명분의 위장전입이 드러났다. 이귀남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민일영 대법관 후보자도 줄줄이 위장전입을 시인해야 했다. 박근혜 정부? 자기 집도 남이 대신 사줬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위장전입자들을 감싸고 중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양해를 구한 인사검증의 큰 원칙과 새로 만들어 보자는 작은 기준들은 “빵 한조각, 닭 한마리에 얽힌 사연이 다 다르다”는 말을 구체화하겠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던 위법은 구제하고 사람들이 공유하는 욕망은 적절한 수준에서 용인하는 방식일 것이다. 다만 출발선이 다른 욕망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하다. 충분한 거 같은데 남을 제치고 더 좋고 더 많은 곳을 찾아가는 그런 욕망들, 남이 볼까 얼굴 붉히며 슬쩍 숨기는 우리의 작은 욕망보다 훨씬 몸집이 크고, 때로는 계획적이고 정교하며 부지런한 그런 욕망들 말이다. 너클볼 인생들과는 다른 궤적을 그리는 인사청문 자료를 10년 넘게 보고 있자니, 욕망은 보편적이되 그것을 실현하는 일은 보편적이지 않다는 실증들만 쌓여간다.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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