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이번 대선 문재인 후보의 슬로건은 “나라를 나라답게”였다. 지난 10년간 “이게 나라인가”를 되뇌던 시절이었기에, 또한 촛불시위 주류가 요구한 것이 ‘정상국가의 복원’이었기에 저 말은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와 별개로 머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나라다운 나라’ ‘정상적인 국가’는 어떤 나라일까? ‘나라다운 나라’는 비(非)국가 대 국가를 전제한다. ‘정상국가’는 비정상 대 정상을 전제한다. 이는 엄밀히 말해 반정립적 규정이지 구체적 내용을 가진 개념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한국 현실정치 자체가 오랫동안 ‘반정립의 정치’였다. 쉽게 말해 반대세력을 자신의 존립기반이자 정당성의 근거로 삼는 정치다. “빨갱이는 안 된다!” 대 “차떼기는 안 된다!” 상대를 악마화함으로써 쉽게 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사회의 비전이나 공적 가치를 숙고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를 악귀로 만드는 프레임, 지역을 갈라치는 선동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최고의 미덕은 신앙심이다. 이른바 “진정성”의 실체다. 진정성은 정치를 도덕으로 만들고 선의로 내용을 대신한다. 그것은 일종의 ‘제스처’라서 증명도 반박도 불가능하다. 내부비판, 성찰의 목소리는 곧바로 ‘프락치’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래서 진정성 넘치는 사회는 항상 불멸의 3항조로 구성된다. ‘우리편’이거나 ‘적’이거나, 아니면 ‘프락치’이거나. 반정립의 정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내용’이 필요하다. 단지 나라다운 나라나 정상적인 국가 같은 말로는 부족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에서 “국민의 생명을 짓밟은 국가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국가”를 언급하고, “새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과 촛불혁명의 정신을 받들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온전히 복원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정초점 두 개를 연결하는 감동적인 연설이었다. 그러나 저기에 제시된 국가를 우리가 지향할 사회상 또는 국가 비전이라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국민의 생명을 짓밟지 않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국가는 그야말로 당연한, 필요 최소한의 국가다. 19세기 야경국가도 그 정도 기능은 했다. 나라다운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세월호 이후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역시 촛불에 답이 있었다. 진주 촛불집회에서 어느 열아홉살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하면 제가 직면한 가정과 학교와 노동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제 삶의 문제가 박근혜, 최순실만의 책임, 잘못입니까? 제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은 박근혜, 최순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부모님, 반장들, 친구들, 선생님, 회사 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답게 행동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 몇 문장에 반세기 한국 사회의 모순이 담겨 있다. 또한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사회상도 사실상 전부 나와 있다. 발언자는 한국 사회의 문제가 최상부 권력자 몇몇의 일탈만이 아님을 폭로한다. 학교, 회사, 가정 등 일상의 모든 영역에 박근혜, 최순실이 있었다. 타인을 도구로만 대하고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자들이 나의 지인, 나의 가족, 그리고 나 자신이었다는 차가운 진실. 체제란 그런 것이다. 공기처럼 감싸고 있는 것. 모두에게 스며들어 있는 것. ‘박정희 레짐’은 박근혜가 쫓겨난 지금도 여전히 한국의 주인기표로 작동하는 중이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언젠가 한국형 축적모델을 “요소동원형 경제”라고 불렀지만 실은 더 적확한 표현이 있다. 바로 ‘인간을 갈아 넣는 체제’다. ‘인간을 갈아 넣는다’ ‘죽을 때까지 쥐어짠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사실의 건조한 진술이다. 한국에서 노동자는 3시간에 한 명씩 죽고 5분에 한 명씩 다친다. 지킬 수 없는 규정을 만들어놓고 사고가 나면 비정규직에게 전부 떠넘긴다. 출산시설도 육아시설도 태부족인데 아이 안 낳는 여성을 이기적이라 비난한다. 아주 작은 권력만 가져도 동료 시민에게 태연히 ‘갑질’을 저지른다. 이 체제는 한때 높은 생산성을 보인 적도 있으나 이제는 오히려 효율만 따져도 폐기해야 할 방식이 됐다. ‘인간을 갈아 넣는 체제’는 하루빨리 ‘사람 귀한 줄 아는 나라’로 전환되어야 한다. 더 정당할 뿐 아니라 더 생산적인 국가는 가능하다. 문재인 정부는 이를 시작할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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