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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자취방의 영화 / 허문영

등록 2017-05-19 18:16수정 2017-05-19 20:38

허문영
영화평론가

병석은 영화감독이 꿈이지만 돈도 없고 연줄도 없어 유일한 재산인 비디오카메라로 결혼식 장면을 찍으러 다닌다. 갈빗집에서 숯불도 피우고, 도로 가에서 성인 비디오를 팔기도 한다. 그의 형은 어느새 동생 이름으로 대출을 했고, 병석은 형의 빚을 떠안게 된다. 채무해결사인 깡패가 그의 자취방을 찾아온다.

병석의 애인 재경은 고등학교 졸업 뒤 보험회사에 1년간 다니다 해고된 적이 있다. ‘카드깡’ 사무실에 취직하지만 우울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하루 만에 잘린다. 그녀는 인터넷 홈쇼핑에서 물건을 구입해 팔려다가 피라미드 사기에 걸려든다. 빚을 갚기 위해 병석은 비디오카메라를 팔기로 하고, 재경은 카드깡 업자를 찾아 나선다.

2004년 노동석 감독은 <마이 제너레이션>이라는 작지만 훌륭한 영화에서 ‘나의 세대’의 초상을 이렇게 그려냈다. 이 영화는 뛰어난 인물화이면서 시대의 공기와 그 작동방식까지 짚어낸 날카로운 풍속화이기도 했다. 노동석은 이 영화를 포함해 평판은 높았지만 흥행은 전혀 안 된 두 편의 독립영화를 만든 뒤 영화판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으나, 다시 돌아와 현재 12년 만에 세번째 장편 <골든 슬럼버>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마이 제너레이션>의 곤경은 이제 중년이 된 감독 자신이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한 곤경이었을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 젊은 감독 중 다수는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투영된 가난한 영화로 영화 이력을 시작했다. 나뒹구는 라면 봉지와 소주병, 꽁초 가득한 재떨이, 여기저기 쌓여 있는 비디오테이프와 만화책들, 얼룩진 벽지,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방 창문… 주인공이 사는 공간은 대개 이러했고 결말에 이르러도 이 추레한 공간을 결국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영화를 사람들은 ‘자취방 리얼리즘’이라 불렀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젊은 한국 감독들이 만든 영화를 한꺼번에 볼 기회가 있었다. 12년이 지났지만 영화의 인물들 중 다수가 여전히 자취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취방은 부모가 떠난 빈집(<소음들>), 가출 소년소녀들의 ‘패밀리’(<꿈의 제인>) 등으로 변형되기도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갈 곳이 없고 그나마 있던 곳에서도 추방된다. 영화들은 간절했고 때로 아름다웠지만, 오래된 무기력과 우울이 시선의 힘을 소진시켰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그들은 이제 세상을 정면으로 보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전 젊은 세대의 가난한 영화 가운데 절창을 만났다. 작년 몇몇 영화제에서 상영돼 화제를 모았고, 올여름 개봉 예정인 <노후대책 없다>(이동우 감독)가 그것이다. 감독이 제작, 촬영, 편집, 음악, 미술까지 도맡은 전형적인 가내수공업 다큐멘터리다. 등장인물들은 스컴레이드를 비롯해 파인 더 스팟, 반란 등 시끄럽기로 소문난 펑크 밴드 멤버들이며, 감독도 스컴레이드의 베이시스트다.

난동이라고 해야 어울릴 정신없는 공연들과 인물들의 일상 및 인터뷰가 뒤섞인 이 소란과 만취의 기록에는 최근 한국영화에서 거의 접하지 못한 역동과 활기가 넘친다. 등장인물들은 펑크가 분노의 음악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여전히 고깃집과 편의점과 피시방에서 일하며 곤궁과 소외에 시달리지만, 자기연민의 수사학 대신 고성과 반역의 퍼포먼스를 택함으로써 이 가난한 다큐멘터리를 도취와 신명의 난장으로 만든다. 자취방 리얼리즘의 영화사라는 게 있다면 <노후대책 없다>는 한 정점에 놓일지도 모르겠다. 기회 닿는 대로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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