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발행인 문재인 정부의 ‘겸손한’ 출발은 일단 이 정부가 민주정부로 불릴 최소한의 자격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민주주의를 뿌리로부터 부정하는 수구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좌고우면하다가는 실패를 면치 못한다는 점이다. 평범한 시민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최선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거 직전까지도 이런 글을 쓰게 될 줄 몰랐다. 지난 일주일 남짓 우리는 참으로 오랜만에 기분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이것은 새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자신을 낮추는 진솔한 자세 덕분이다. 그의 행보는 그 자신이 왜,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고, 따라서 자신의 임무는 무엇보다 ‘촛불민심’을 받드는 데 있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당선이 확실해지자 한밤중임에도 그는 가장 먼저 광화문 광장으로 가서 ‘세월호 가족’들을 만났고, 소박하나 위엄 있게 치러진 취임식에서는 간결한 연설을 통해서 자신은 군림하는 권력이 아니라 시민들의 친구가 될 것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곧장 인천공항으로 가서 비정규직 노동자 1만명의 신분이 곧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임을 공언·약속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대통령의 집무실을 붉은 카펫이 깔린 폐쇄적인 청와대 본관이 아니라 참모들과 자유로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옮기고, 그 건물의 명칭도 ‘위민관’에서 ‘여민관’으로 변경했다.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명칭 변경에는 국가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새 대통령의 정치철학이 내포돼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위민이나 여민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유교사상에 입각한 옛 왕조시절에도 유교 본래의 이념에 충실하려 했던 유림들에게는 임금과 백성의 관계는 상하관계도, 지배와 복종의 관계도 아니었다. 유교정치의 이상은 근본적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백성과 함께하는 정치였다. 그러므로 왕조시절도 아닌 오늘날 ‘위민’을 운위하고, 그것을 언론도 군말 없이 수긍해왔다는 것은 그동안 이 나라가 얼마나 몰상식한 자들에 의해 지배돼왔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증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대통령의 행보에 대해서, 그게 결국은 정권 출범기의 일시적인 현상, 즉 작위적인 연출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좋다,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국가운영의 최고 책임자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면 대다수 시민들한테 진정으로 환영받을 것인가를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우리 경험으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대체로 권력에 한없이 약한 법이다. 권력에 약하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이다. 첫째는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 비굴해지거나 적어도 온순해진다는 것이다. 둘째, 권력 앞에서의 이러한 굴종적인 자세를 뒤집어보면, 거기에는 자신이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가 권력자가 되면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지고, 나아가서는 그러한 권력을 계속해서 누리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권력욕망은 사실 너무나 뿌리가 깊은, 보편적인 인간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예외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인간이 우리들 중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문재인이라는 개인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따라서 그가 지금 공적인 공간에서 보여주는 ‘겸손한’ 모습이 그의 천품 때문인지 혹은 잘 숙고된 의도적인 행동인지 잘 모른다. 그리고 한때 항간에 떠돌던 소문처럼, 원래 그가 소위 ‘권력의지’가 약한 인간인지 아닌지도 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결국 ‘촛불민심’의 결과로 새 정부의 리더가 되었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의 리더십이 군림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구성원들에게 복종함으로써 (조직을) 이끌어가는” 전형적인 민주적 리더십을 구현하려 하는 것으로 보일 뿐 아니라 아직은 그것을 의심할 만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문재인의 요 며칠 동안의 모습을 보면서 특히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다름 아닌 우루과이의 전 대통령 호세 무히카이다. 그에 관한 책은 이미 번역되어 나온 게 있고, 2015년 3월 그의 퇴임 전후해서는 세계 언론들의 경쟁적인 취재의 영향 탓인지 국내의 몇몇 언론들도 그의 비범한 직무 자세와 소박한 생활스타일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는 제목 밑에서 호들갑스럽게 보도했다. 그리하여 무히카 대통령은 재임 중 자신의 봉급 대부분을 시민운동단체들에 기부하고, 널찍한 대통령궁은 노숙자들의 숙소로 제공하고, 자기 부부는 교외의 오두막에서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살면서 낡은 소형 승용차를 직접 운전하여 출퇴근을 하고, 공휴일에는 화초를 가꾸고, 그 오두막으로 손님이 찾아오면 손수 차를 끓여 내놓고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등등, 대통령으로서는 기이할 만큼 극히 소탈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전했다. 그러나 무히카 대통령 자신의 말대로, 그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욕심 없는 대통령이었다. ‘가난한’ 것과 ‘욕심 없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현대의 언론들이 얼마나 천박한 정신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무히카 대통령이 무욕의 인간임을 알려주는 에피소드는 많지만, “인간을 타락시키는 원흉은 붉은 카펫”이라는 그의 말은 깊이 음미할 만하다. 그리고 그는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평시에는 물론 심지어 유엔 총회와 같은 거창한 공식행사장에서 연설을 할 때도 그랬다. 그는 자유로운 인간이 무엇 때문에 헝겊조각으로 목을 졸라매고 살아야 하느냐고, 이른바 ‘지도자의 품격’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에게 되물었다. 무히카는 원래 군부독재에 맞선 무장 게릴라 출신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14년간 감옥에 갇혔고, 그중 7년은 독서도 집필도 금지된 독방에 감금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혹한 감옥생활을 통해 심신이 붕괴되기는커녕 강인한 정신적 에너지를 얻었고, 그 에너지를 온갖 정치적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을 개선하는 헌신적인 투쟁에 사용했다. 대통령 재임 중 간혹 빈민지역을 탐방할 때도, 여느 부르주아 정치가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그는 곧장 아무 집이나 자연스럽게 들어가 그 집 아이들이 자신만의 매트리스를 갖고 있는지 알고자 했다. 가난한 이들의 내적 삶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는 대통령이기에 우루과이의 평민들은 무히카를 자기들의 진정한 친구로 여겼고, 그 때문에 그는 오히려 퇴임 시에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어느 외국 기자가 “이렇게 인기가 높은데 정말 대통령 한번 더 하고 싶지 않으냐”라고 짓궂은 질문을 하자 “나는 공화주의자”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즉, 국가란 개인의 권력욕망 충족의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민주정치란 기본적으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욕구에 민감하게 응답하는 정치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정부의 리더는 사실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겸손한’ 출발은 일단 이 정부가 민주정부로 불릴 최소한의 자격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민주주의를 뿌리로부터 부정하는 수구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좌고우면하다가는 실패를 면치 못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국가적 난제를 혼자 혹은 어설픈 정치적 타협을 통해 해결할 생각을 버리고, 평범한 시민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최선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경우, 오늘날 세계적으로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살리는 실효적 방법으로 갈수록 주목받고 있는 ‘시민의회’를 적극 활용한다면 활로는 의외로 쉽게 열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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