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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변화를 만들어내는 민주주의 / 서동진

등록 2017-05-12 18:27수정 2017-05-12 21:34

서동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출구조사가 발표되면 본격적으로 시작될 개표 방송을 즐기자며 친구들과 먹고 쓰러질 만큼 넉넉히 술을 사고 안주를 골랐다. 그렇지만 출구조사가 발표되고 후보들의 동정을 전하는 화면을 보면서,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기분이 눅눅해지는 눈치가 완연했다. 심드렁하게 몇마디를 하고는 다들 딴전을 피우는 기색이었다. 나 역시 그런 분위기를 거들며 따분한 기분에 술만 홀짝였다. 그토록 괴물 같은 정치집단이 몇달 먼저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정신건강상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딱히 유쾌한 일이 일어난 척 시늉할 필요도 없었다. 눈치껏 술자리는 일찍 파했다.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세상은 조금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뒤에는 은밀한 믿음이 숨어 있는 듯싶다. 그것은 불길한 믿음이다. 변화를 빙자한 그 세계는 실은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위해 동원된다. 결국 약간의 변화는 꿈쩍 않고 바뀌지 않는 세계를 눙치려는 알리바이일지도 모를 일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수십년간 묵묵히 견뎌온 이 끔찍한 경제질서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바뀌지 않을 것이며, 기업의 비위를 거스르는 짓은 절대 있을 수 없으며, 한-미 동맹을 금가게 하는 일 역시 불가능한 것이라는 등등의 믿음은 재차 확인된다. 득표수가 갱신되는 화면을 보며 우리는 약간의 변화를 얻고 그 대신 이따위 세상은 절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의 신전 속으로 기어 들어간 것 같았다. 신날 리가 없었다.

진작부터 큰 관심이 없던 선거였지만 그래도 가끔 뉴스를 기웃거리게 한 것은 진보 후보의 약진 때문이었다. 그는 대선 후보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5년마다 한 번씩 기존의 집권세력에 대한 환멸과 염증 때문에 다른 진영의 후보를 선택하는 일이 되어버린, 민주주의 아닌 민주주의를 비토하는 듯 보인 유일한 후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차피 당선 가능성이 없는 후보였다. 여느 선거처럼 후보 단일화를 위해 중도 사퇴할 여지 역시 없었다. 아마 그가 당선 가능성이 농후했다면 이미 선거를 보물처럼 섬기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본색을 드러내며 선거 자체를 철회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는 체제를 대변하는 후보들 사이에서 이 체제가 아닌 세상을 향해 발을 디딜 필요가 있음을 에둘러 암시했던 후보였을 것이다.

그를 선택하는 것은 대통령 후보로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선택, 5년에 한 번 거행되는 인기투표 이벤트가 아닌 투표, 어떤 세계에 살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으로서의 투표에 기대를 거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당선 가능성 없는 득표는, 선택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 이상의 것을 선택하는 몸짓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심 그가 너끈히 10퍼센트 이상의 지지를 받기를 기원했다. 다양한 선택이 좋다며 그토록 너스레를 떨면서도 정치에 관해서는 자유민주주의만이 유일하게 옳은 선택지라며 거품 무는 역겨운 허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그가 어떤 충격의 소음을 내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좋은 성적표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괜찮다.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선거가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일이라 여기는 자들의 투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 투쟁을 막고 가둔다면 우리는 변화가 변화의 장벽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의민주주의라는 남루해질 만큼 남루해진 망상으로부터 조금은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선거에서 모든 성적이 셈해진 건 아니다. 그것은 아직 결산되지 않은 성적표다. 아직도 셈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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