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특파원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3일 국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첫 취임 연설을 했다. 되새김질이 필요하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가장 정제된 형태의 외교정책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존재감이 보이지 않아 ‘투명 장관’으로 평가절하돼온 틸러슨 장관의 ‘커밍아웃’ 선언으로 볼 수도 있다. 틸러슨 장관의 연설은 앞으로 문재인 정부가 미국 외교정책을 가늠하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은 국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언제든 정책을 바꿀 가능성이 있다. 대비해야 한다. 그럼에도, 틸러슨 장관의 행보는 지난 4월 초 미-중 정상회담 이후 상당히 일관돼 있다. 나름 신뢰할 만하다. 틸러슨 장관은 연설에서 ‘4노(no)’+한반도 비핵화를 언급했다. 북한에 대한 △정권 교체 △정권 붕괴 △인위적인 통일의 가속화 △38선 이북으로 넘어가는 것 등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4노’에 해당한다. ‘4노’는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훌륭한 공통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정권 교체와 붕괴, 흡수통일 등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세가지 기본 원칙에 문재인 정부는 ‘당연히’ 동의할 것으로 본다. 여기에다 네번째 원칙, 즉 ‘38선 이북으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언명은 일종의 ‘불가침 선언’이다. 이 모든 원칙들이 상호 체제 인정과 상호 불가침 약속을 담고 있는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의 내용과 닿아 있다. 틸러슨 장관은 또한 ‘한반도 비핵화’가 모든 대북 접근법과 전략을 구축하는 출발점이라고 규정했다. 주변국이 이 목표에 모두 동의하고 있는 유용한 목표라고도 했다. 1992년 발효된 남북 간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과 다르지 않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을 떠올리면, 나쁘지 않다. 또한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 기저에는 알게 모르게 사실상 흡수통일이나 붕괴 전략이 깔려 있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시기와 조건에 따라 다소 편차가 있었지만 대체로 ‘4노’를 명확하게 천명하지 않았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었으니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었다. ‘4노’+한반도 비핵화는 기본 전략이자 목표다. 이미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는 절반 이상 대북 정책 공감대를 갖고 출발하는 것이다. 제재냐 대화냐는 전술이다.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전술적 차이는 극복할 수 있고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 성과가 나오면 해소된다. 틸러슨 장관은 지난달 28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장관급 회의를 연 것을 계기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4노’ 방침을 전달했다고 한다. 중국은 북한과의 ‘당 대 당’ 창구인 대외연락부를 통해 미국의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반응은 알려지지 않았다. 추가적 상응대가를 요구하겠지만 진지하게 탐색할 가능성은 있다. 이제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외교공간을 창출해 나갈 차례다. 북핵 접근법과 관련해 한-미 간 공통분모가 이미 많다며 ‘의도적으로’ 낙관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미국의 일부 보수 언론과 대북 강경파 전문가들이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 관련 이견 가능성을 과도하게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 구체화되지 않았는데도 가능성만을 놓고 정권 출발 첫날부터 흔들기를 하는 듯한 모습은 좀 불편하다. 그들에게 ‘노무현 트라우마’가 있다면, 우리한테는 ‘부시 트라우마’가 있다. 최소한 몇개월은 인내하고 지켜보는 것이 한-미 동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보수적인 한국 정부만이 한-미 동맹의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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