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호
논설위원
9일 오후 8시, 19대 대선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온 나라가 더불어민주당 당색인 파란색으로 뒤덮였으나, 대구(자유한국당 44.3%), 경북(51.6%), 경남(39.1%) 등 세 곳만 자유한국당의 빨간색이 선명했다. 섬 같다.
1위인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번 대선은 박근혜 정권의 비리와 부패로 인해 실시되는 선거다. 새누리당에서 이름만 바꾼 자유한국당은 양심이 있다면, 아니 상식이 있다면, 후보를 내지 않는 게 옳았다.
게다가 자유한국당 후보는 홍준표다. ‘돼지발정제’, ‘경상도에선 장인어른을 친근하게 표시하는 속어가 영감탱이’, 이외에도 무수한 막말과 ‘친북좌파, 강경노조’만 주야장천 읊은 후보다. 보수와 영남이 홍준표를 지지하는 가치가 무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내 고향은 대구다. 대구에서 나서 고등학교까지 다녔고, 지금도 친척과 친구들이 많이 산다. 다른 지역에선 대개 55살 언저리에서 보수와 진보 지지층이 나뉘는데, 대구에선 이 경계선이 45살 정도까지로 내려온다.
1997년 대선 때 대구 민심기행 취재를 갔을 때다. 중앙공원에서 만난, 갓난아이 업은 29살 주부가 “이회창 찍을라꼬예. 그냥예. 여~는(여기는) 다 내맨치로(나처럼) 그렇심더(그렇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20대가 보수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보다, 왜 지지하는지 아무 이유가 없다는 데 더 놀랐다. 대구에서 나보다 서너 살 어린 후배들을 만나 이야기를 할 때도, 비단 정치 문제가 아니어도 열 살, 심지어 스무 살 더 먹은 어르신과 얘기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대구 경제는 몇십년래 최악이다. 섬유와 건설업이 발달했던 대구에서 꽤 잘살았던 초등학교 친구들 가운데 체감하기로는 90%가량이 망했다. 아버지대 아니면 아들대에서. 한평생 부잣집 도련님으로 살던 친구들이 김밥집을 하거나, 미국으로 이민 가 빌딩 청소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자유한국당 지지한다. 이게 대구다.
70대인 어머니는 선거 직전 주말 가족모임에서 “친구들이 카톡으로, 전화로 ‘홍준표 찍으라’고 난리다. 안 찍어도 홍준표 찍었다고 해야 될 판”이라고 했다. 이게 대구다.
부끄럽다. 매년 가을마다 대구를 연고지로 두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는 사람으로서. 과거 ‘조선의 모스크바’라며 진보적 기원이 있던 대구가 어떻게 이리됐는지를 이야기하려면 훨씬 더 긴 글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이번 선거에서 ‘대구의 희망’을 보려 한다. 홍준표가 대구에서 얻은 표는 45.4%다. 과반이 자유한국당을 찍지 않았다. 대구보다 평균 연령이 높아 더 보수적인 경북도 48.6%로 역시 과반을 넘진 않았다. 절반이 홍 후보를 외면했다. 5년 전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대구는 80.1%, 경북은 80.8% 지지를 보낸 것과 비교해 보자. 1987년 시민혁명 이후 치러진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대구 투표자의 70%가 노태우 민정당 후보를 지지했다. 2017년 촛불혁명 뒤 치러진 이번 선거에선 45%가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지지했다. 어쨌든 진전 아닌가.
대구에서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가 이번 정도에만 그쳐도 자유한국당은 두 번 다시 정권을 넘볼 수 없다. 그리고 3년 뒤 총선에서 대구·경북, 서부 경남 일부의 당선자만 오글거리는 지역 수구정당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니 대구를 조롱하고 비웃더라도, 홍준표 후보 아닌 다른 후보를 지지한 절반 이상의 대구 사람들을 조금은 품어줬으면 한다.
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