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1960년 4월26일의 이른 아침에 김수영은 이 시를 썼다. 4·19 혁명의 감각이 생생할 때였다. 학생들의 선연한 희생에 대한 고통 역시 말할 수 없이 강렬한 시기였다. 그러니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는 직정적인 시가 뿜어져 나왔을 것이다.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는 외침은 시대를 건너뛰어 오늘의 시민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촛불의 의미가 거기에 있는 것 아니겠나. <기도>(1960. 5.18.)에는 혁명에 대한 보다 정화된 인식과 기대가 드러난다.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김수영에게 민주주의는 권력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성취하는 혁명은 권력에 의해 뒤틀림 상태에 있었던 사랑의 본래적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다. 시를 쓰는 마음, 꽃을 꺾는 마음,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 회복할 수 없는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은 강압적 폭력 속에서 왜곡된 인간다움을 기어이 회복하는 일이다. 대통령은 현대판 군주가 아니다. 시인들에게 민주주의는 자기통치를 의미한다. 이는 신동엽의 <산문시1>(1968. 11.)에도 잘 드러난다. 이 시에는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의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등장한다. 그런데 시민들은 그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은” 훤히 알고 있으며,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지성”의 소유자다. 이들은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하며 “배짱 지킨 국민”들이다. 그곳에서 대통령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오늘의 성주에서 사드 반대 투쟁을 하고 있는 시민들을 떠올려 보면, 시와 현실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동엽의 “석양 대통령”은 김해자의 <내가 대통령이, 라면>(2017. 1.)에서는 “천하태평한 헐렁한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뺑뺑이를 돌려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큰일은 절대 하지 않으리. 지구가 한 번만 몸부림치면 속절없이 무너져 깔릴 바벨탑 같은 건 쌓지도 않으리, 100층짜리 건물을 올린다거나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조차 쌓지 않으리,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정든 추억 같은 건 함부로 허물지 않고 억조창생 이어온 목숨들 억울하게 쫓아내지 않으리라. 물길은 물길대로 산길은 산길대로 그냥 내버려두는 천하태평 헐렁한 대통령이 되리라.” 시는 권력에 대항하기도 하지만, 그것의 폭력성과 무상함을 근원적으로 상기시키면서, 어느 정도가 아닌 완전한 민주주의와 자치를 촉구한다. 김수영의 전언 그대로 썩은 시대와 매섭게 결별한 후,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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