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올해는 마르틴 루터(1483~1546)가 주도한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루터의 유명한 ‘95개조의 의견서’가 1517년에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비종교인인데다 기독교를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고 있다가, 최근 읽은 몇 권의 책에서 종교개혁 과정에서 일어난 루터와 에라스뮈스(1466~1536) 사이의 격렬한 논전을 접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말이 개혁이지, 유럽 종교내전인 30년전쟁(1618~1648)까지 포함하면, 130년 동안 당시 독일 인구의 3분의 1인 400만명이 죽은 무시무시한 유혈혁명이었다. “에라스뮈스는 종교개혁의 알을 낳아 주고, 루터가 그것을 부화시켰다”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초기에 정신적 동지처럼 보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개혁이 유럽 전역의 거대한 갈등으로 번져가자 곧 틀어지고 험악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쟁점은 교리와 갖가지 의례에 걸쳐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전통을 에라스뮈스는 지지했고, 루터는 반대했다는 것이다. 에라스뮈스는 평생 교황청과 고위 성직자들을 비판했지만 결국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교회를 참아내겠습니다. 이 교회가 더 좋아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더 좋아질 때까지 이 교회도 나를 참아주어야겠지요.”(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그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던 루터는 이런 어정쩡한 태도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이렇게 내뱉는다. 에라스뮈스는 “신과 종교 두 가지를 다 조롱하고 밤낮으로 모호한 말만 생각해내며, 많은 말을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음험한 사내”라는 것이다.(슈테판 츠바이크, <에라스무스 평전>) 현실에서의 승리자는 루터였다. 가톨릭교회와 개혁자들 양쪽으로부터 비난받으며 권력의 비판자와 권위의 옹호자라는 살얼음판을 걷던 패배자, 평화와 인본을 앞세우던 떠돌이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를 500년이 지난 뒤에 칭송하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츠바이크는 “사람들은 문학의 세밀한 언어, 깊은 사색 끝에 나온 언어를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사람들이 듣는 유일한 언어는 거칠고 격정적인 정치 언어이다”라며 에라스뮈스를 두둔한다. 하지만 루터야말로 성서를 읽고 또 읽어 “교리가 훼손되기 전의 본모습을 보려 한 혁신가”이고(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 127권에 달하는 책을 쓴 “말의 사람”이며 “천대받던 독일어를 민중에게 돌려준” 위대한 문학가(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의 승리야말로 진정한 말의 승리라는 것이다. 에라스뮈스의 ‘비선택’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의 비선택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크라카우어는 에라스뮈스를 움직이는 본질적 동력이 “진실이 교리가 됨으로써 진리의 표식인 애매성을 잃어버리는 바로 그 순간, 진실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는 확신”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확신을 뒤집어 말할 수도 있다. 진실의 애매성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는 그 모호한 진실, 오류와 결함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진실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오류와 결함투성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비선택의 영역, 선택지들 사이에 있는 어쩌면 선택지들보다 더 중요한 틈새, “제도화된 프로그램으로 굳어지지도 않았고 굳어질 수 없었던”, 크라카우어의 표현대로라면 “궁극의 통일”을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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