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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소수자를 반대하는 국민통합? / 홍성수

등록 2017-04-26 18:36수정 2017-04-26 21:08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동성애 반대합니까?” “그럼요.” 토론회를 듣고 있는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방송'에서 무려 ‘대선후보'들이 이런 문답을 주고받을 수 있단 말인가?

선거 때 유연하고 점진적인 소수자 정책을 제시하는 건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기대까지 포기하게 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최소한 소수자가 우리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점을 의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선거’는 변명이 될 수 없다. 특히 사회 유력 인사나 정치인에게는 강한 윤리적 책임이 요청된다. 그들의 발언은 사회의 차별적 환경을 악화시키거나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정치인들의 공개적 차별 발언이나 방송에서의 혐오 표현을 유난히 민감하게 보고, 심지어 법적 책임까지 묻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진심으로 후보를 사랑하고 지지한다면, 청자에게 “그렇게 듣지 말라”고 강요할 게 아니라, 화자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게 맞지 않을까?

대선 국면에서 배제되고 있는 건 성소수자만이 아니다. “서민 대통령”을 표방한 한 후보는 종북좌파를 “박멸”하고 강성귀족노조와 전교조를 “손보겠다”고 한다. 노조나 좌파에 비판적인 건 보수 고유의 이념이라고 해도, 박멸하거나 손봐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면 전혀 다른 문제다. 종북좌파, 강성귀족노조, 전교조를 박멸하고 “서민” 대통령이 되겠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국민이 이긴다”는 후보는 별말이 없다. 도대체 어떤 국민이 이기는 걸까? 이 국민이라는 말 속에 성소수자, 종북좌파, 강성귀족노조, 전교조는 포함되는 건가 아닌가? 색깔론에 휘말릴까, 보수표를 잃을까 걱정하는 순간 새정치의 희망은 갈 곳을 잃어버린다.

세계적으로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정치가 인기를 끄는 건 사실이다. “당신들께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라는 ‘긍정의 언어’보다는 “저들을 쫓아내겠습니다”라는 ‘부정의 언어’가 선동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선거 전략일 뿐이라고? 그 전략의 원조가 바로 히틀러였고 나치였다. 그들은 그렇게 유대인을, 성소수자를, 장애인을,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학살했다.

한국은 아직 그 정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천만에. 나치가 준동할 무렵 나치가 그리되리라고 예상한 이들은 없었다. ‘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가 ‘저들을 반대한다’가 되고, ‘저들을 반대한다’가 ‘저들을 박멸하자’가 되는 건 순간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한국의 유력 대선후보들이 히틀러 같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혐오와 차별을 방치한다면 어느 순간 어떤 계기에서 문제가 폭발할지 모른다. 그들의 ‘선의’와는 무관하게 그들의 무책임과 무관심이 야기할 수 있는 사태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진짜 “선제타격”이 필요한 곳은 혐오와 차별이 스멀스멀 움트고 있는 곳이다. 위험한 선동을 하는 후보는 물론이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고 있는 후보들도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이유다.

기억들 하실지 모르겠지만 박근혜 정부는 “100% 국민대통합”을 기치로 내걸고 출범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국정과제였다. 그래 놓고는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키고,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만들었다. 진짜 청산해야 할 적폐는 이 사이비 대통합론이다. 생각과 정체성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통합이다. 무작정 하나가 되는 통일이 아니라, 다양성이 공존할 때 우리는 통합을 이야기할 수 있다. 2017년 한국의 대선 정국은 분명 퇴행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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