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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가족인간과 세종대왕을 넘어서

등록 2017-04-26 18:22수정 2017-04-26 21:16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당선권에 가장 가까이 있는 두 후보가 닮고 싶은 인물로 똑같이 ‘세종대왕’을 꼽았다. 놀라운 건 누구도 이에 대해 이상하다고 웃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프랑스 대선 후보가 닮고 싶은 인물로 앙리 4세를 꼽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을 게 분명하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검찰 조사에서 “가족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는 뉴스를 본 순간 머리에 떠오른 단어가 바로 ‘가족인간’이었다. 철학자 아렌트는 “혼란한 경제 상황이 주는 압박 아래서 가족남성과 가족여성은 안전과 안락한 생활만 보장된다면 어떤 일도 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고 쓴 바 있다(<조직화된 범죄와 보편적 책임>). 이후 가족남성과 가족여성, 즉 ‘가족인간’(family men)은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나치 독일에 협력한 이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최소한의 윤리감각조차 결여한 것처럼 보이던 안하무인의 엘리트도, 제 가족만큼은 끔찍이 아끼고 있었던 거다. 불법, 뇌물, 협박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딸을 지원했던 최순실의 모정은 또 얼마나 절절했던가.

가족인간의 반대편에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화신처럼 이야기되는 계백장군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당·신라 연합군에 맞서 황산벌 전투를 앞둔 계백이 패전 시 노비가 될까 우려해 자기 손으로 처자를 모두 죽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글자 그대로 사(私)를 모두 멸(滅)해버린 셈이다. 물론 이건 고대의 일화다. 그가 한 짓은 부정할 수 없는 살인 범죄이며 오늘날 아무리 멸사봉공 정신이 강한 사람도 저런 잔혹한 짓을 저지르진 않을 것이다. 다만 공적 사명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하나의 상징적 유형으로 설정해볼 수는 있겠다. 특히 한국에는 사리사욕만 추구한 지도자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계백장군형’ 지도자가 이상화되는 경향이 있다. 정치인들이 틈만 나면 방명록에 ‘멸사봉공’ 네 글자를 적는 것도 그 때문일 터.

그러나 이런 멸사봉공의 가치 혹은 관점이 현재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이상인지는 의문이다. 멸사봉공은 국어사전에 ‘사욕을 버리고 공익을 위하여 힘씀’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본래 일본에서 자주 쓰던 말로 일제시기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고, 박정희가 매우 좋아하던 문구였다. 사실 일제 잔재이거나 독재자가 즐겨 썼단 이유만으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일제 이전에도 극기봉공(克己奉公), 배사향공(背私嚮公) 등 거의 동일한 의미의 금언이 존재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말들의 바탕에 공히 깔려 있는 봉건성이다. 저기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이미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무엇이 공익, 즉 사회 전체의 이익인지가 의심의 여지없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회 전체의 이익’이라는 말 자체가 거대한 블랙박스다. 그건 누구의 이익을 말하는가? 누가 그걸 정하는가?

봉건적 세계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시공간이다. 왕, 귀족, 성직자 같은 고귀한 신분의 인간이 미리 답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공익이라고 하면 그게 공익이고, 그들이 성스런 전쟁이라고 하면 성전이라 불렸다. 현대 민주주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거기서는 무엇이 공익인지를 놓고 격렬히 논쟁하고 갈등한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범주와 취급 또한 계속 변한다. 집에서 설거지를 하는지 여부는 과거엔 논쟁거리조차 아니었지만, 지금은 남성 정치인의 젠더 감수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로 여겨진다. 정치 지도자의 ‘어떤’ 사적 측면들은 더 이상 프라이버시가 아니다. 엄연한 사회적 토론의 대상이다.

4월25일 열린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당선권에 가장 가까이 있는 두 후보가 닮고 싶은 인물로 똑같이 ‘세종대왕’을 꼽았다. 놀라운 건 누구도 이에 대해 이상하다고 웃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프랑스 대선 후보가 닮고 싶은 인물로 앙리 4세(프랑스의 세종대왕이라 할 정도의 성군이었다)를 꼽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을 게 분명하다.

대통령을 왕과 동일시하는 이런 ‘성군(聖君) 판타지’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화 지체 중 하나다. 대통령이 가족인간이어서 안 되는 건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계백장군이나 세종대왕이어서도 곤란하다. 민주제 하의 대통령은 무지렁이들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나는 우리의 지도자가 특출나지 않더라도 온전한 공화국 시민이길 원한다. 그 시민의 최소 요건은 칸트가 말한 것처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곧, 약자와 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동정하는 게 아니라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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