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최근 조세희의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에 대해 생각할 계기가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그의 소설이 출간 이후 300쇄를 찍었는데 총 발행부수가 137만부였다는 기사였다. 명작의 반열에 오른 이 소설의 문학사적 의미를 생각해볼 때 그것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졌다. 지난 칼럼에서 대략 전체 인구의 5% 정도가 한국 소설에 대해 충성도가 높은 독자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 좋은 작품이 255만부 정도는 팔릴 수 있지 않나 가정했다. 그런데 거의 40년 동안 작품의 중요성이나 그 명성에 비해 <난쏘공> 판매량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 이유가 뭘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꼭 문학 강의가 아니라도 나는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을 거론하면서 학생들과 자주 토론을 한다. 물론 오늘날의 학생들은 1970년대 돌격적 산업화 당시의 ‘은강’으로 상징되는 공단 도시와 난장이 일가의 비극적 삶을 둘러싼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세희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율법’의 성격에 대해서는 열띤 의견을 피력하는데, 문제는 이들이 소설을 읽어보지 않고도 이미 읽었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교과서에서 읽어본 것이 전부임에도. 그러다가 최근에 문학비평가 김명인이 산문집 <부끄러움의 깊이>에서 <난쏘공>에 대해 논의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고갈되어 가는 존재들’이란 산문에서 그는 최인석의 장편 <연애, 하는 날>이 조세희의 <난쏘공>과 유사한 모티프를 다루고 있다고 읽어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쏘공>에 비해 “이 소설이 드러내는 대립의 이미지가 유독 더 무자비하고 가차없어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어서 그 원인이 “1970년대의 ‘난쏘공’은 사랑을 믿었고, 이 2010년대의 ‘난쏘공’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 있음을 환기시킨다. 요컨대 “<난쏘공>에는 반성하는 신애가 있고, 학생운동가에서 노동운동가로 전신한 지섭이 있고, 동요하는 부르주아 윤호가 있”다. 그런데 “이들이 자본과 노동 사이에 끼어들어 부르주아들의 양심의 동요를 일으키고, 중산층을 공분하게 하고, 나아가 노동계급의 편에 서서 싸우”게 만든 것인데, “<연애, 하는 날>에는 지섭도 신애도 윤호도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내 식으로 정리하면, 중간계급의 완전한 몰락으로 요약된다. 중간계급은 동요하는 다수였다. 그들은 지배계급으로의 상승 욕망을 갖는 동시에 노동계급에 대한 공감 능력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1990년대를 거치면서 극소수는 상승 이동하고 대다수는 중간층에서 탈락·몰락하면서, 김명인 식으로 말하면 “자기연민” 상태로 폐쇄된 게 아니었을까. 그 결과 “중간계급의 완충적 역할”이 상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자신이 “사회적으로 고갈되어 가는 존재”로 희미해져 갔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두 차원에서 소설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첫째, 소설은 중간계급인 시민의 성장 속에서 등장한 것인데, 그들 자신이 고갈되어 가고 있다면 소설 양식 역시 그 역사적 운명을 함께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 무자비하고 가차없어진 현실 속에서 노동계급은 미학적 연대감의 표현일 재현의 장에서조차 추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장이 가족들과 이렇게 결별해도 되는 것일까. ‘사랑’의 세계에서 이탈함으로써 우리는 과연 더 나아진 것일까. 이것이 좋은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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