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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병익 칼럼] ‘인간의 얼굴’을 한 거버넌스

등록 2017-04-13 18:27수정 2019-10-17 16:33

1960년의 4·19 총성과 80년대의 최루탄을 거쳐 2010년대의 촛불 축제 속에서 이제 새로운 희망으로 민주주의적 정치 선진화와 평등주의적 경제 발전의 미래를 기대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지금 ‘인간의 얼굴을 한’ 거버넌스로 행복의 정치경제학을 약속하는 인물에게 내 귀중한 한 표를 드릴 참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조용하고 단정하지만 더없이 단호한 이 선고는 내 평생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삼엄했다. 3주 후, ‘아니다’ ‘모른다’는 말끝에 올림머리를 풀어내리고 구치소로 들어가는 그 모습 역시 내가 보아온 숱한 장면 중 가장 생소한 모습이었다. 나는 <심판>에서 내려진 선고로 하루아침에 <변신>에 이른 카프카 세계를 헤매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현실은 문학적 비유가 아니었고, 무지의 선의는 교활한 악의보다 위험할 수 있다는 볼테르적 냉소의 세계였다.

그 삼엄과 냉소 사이에서 그럼에도 나는 비관한 것이 아니라 “‘박의 시대’ 침몰, 이제 새 시대로 출항이다”(<한겨레>, 4월1일치 1면 표제)의 희망을 읽었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란 서울시청의 현판 사진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다시 떠올렸다. 주변 강대국들의 겁박과 국가권력 중심의 공백으로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가 감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대는 아렌트식으로 ‘민주주의의 일상화’란 보다 높고 성숙한 실천적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희망의 ‘골든 타임’으로 고양되고 있었다.

흔히 동의하듯 우리나라는 경제, 문화, 사회의 발전을 이루었고, 그럼으로써 우리 삶의 형태는 선진화되고 있음에도 정치만은 여전히 후진적이었다. 바로 그 후진성을 스스로 서슴없이 보여줌으로써 거꾸로 그것의 선진화를 드러낸 일련의 탄핵 과정을 통해 우리도 정치적 낙후를 벗어나고 있음을 예감케 한다. 강력한 군대식 교도 민주주의를 드디어 탈피하고 정당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새로운 차원으로 오르기 위한 진통을 우리는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으리라는 신뢰감도 더불어 일고 있다. 이 사태는 박정희 시대의 종언이며 두 세대에 걸친 그의 근대화 프레임의 지양을 의미한다고 믿으면서, 때마침 진행되는 대통령 선거로 내 희망은 옮겨간다. 그 희망이 당장 이루어지리라는 바람은 지나치게 성급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역대의 대통령들이 부닥쳤던 자기 파탄의 결말에서 벗어나 헌법과 그 정신들이 진정한 시민들의 권리로 정착할 가능성이 든든하게 살아나고 있음을 믿고 싶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획득한 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근대화를 추구하고 경제 발전에 성공한 것은 오늘의 우리를 위해 매우 다행한 패러독스였다. 그가 장기 집권만을 추구했다면 빈민정책을 써야 했지만 그는 부민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경제 성장의 성취와 더불어 민주주의의 자질을 지닌 중산층을 형성했다. 그 결과가 수출 드라이브를 추진함으로써 양적 성장을 추구하여 경제적 근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의 독재화 의지와 시민들의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맞서면서 정치적 성숙을 유예한 불구적인 근대화였다. 4·19의 자유주의와 5·16의 군사독재란 이 ‘이인삼각’의 모순적인 프레임은 강압적인 유신 체제와 학생 지식사회의 반항이 힘겨루기를 하며, 근대로의 진행은 진전과 퇴행을 동시에 감수해야 하는 모순적 길항으로 점철되었다. 이 통치 방식은 역동적인 사회문화적 변화를 겪으면서도 그의 딸에게 변형, 전수되었고 그것이 또 부메랑이 되어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이란 참담한 사태를 낳았다.

그 아버지는 권력 탈취 후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 헌법 정신을 짓밟는 유신, 법 위에 군림한 긴급조치의 발동으로 권력과 정책을 자행했고 그 비판 세력들을 ‘척결’했다. 그에게는 존중해야 할 것은 자신의 지시뿐이었고 그것을 반세대 넘는 동안 체제화한 ‘유신’의 그 유령은 그의 사후에도 출몰했다. 군부 정권에 전수된 그 통제정치의 유산은 90년대 이후의 여러 문민정부들이 시기마다 다른 방식으로 지우고 수정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드디어 정치적 민주주의를 시민사회 속에 정착시키는 데 상당한 진전을 보았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내면화, 생활화에 미처 이르기 전에 그의 딸은 오히려 전 시대로 회귀하여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와 통치의 공적 장치를 ‘질서 밖으로’(out of order) 밀쳐 고장 내고 ‘체제 밖으로’(out of system) 쫓아내, 공과 사의 구별 없이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권력의 중심 해체(out of being)로 역행했다.

대통령이란 직책에 대한 그녀의 착오는 결국 그 아버지가 무력화시켰던 법의 심판을 통해 탄핵과 파면을 당해야 했다. 이 경이로운 반전은 문자로 표현된 문민의 법이 총칼로 무장한 권력보다 더 존중받는 시민민주주의에서 나온 것이고 광장의 민주주의가 꽃피운 촛불 시위의 부드러운 힘을 통해 발휘되었다. 이 과정을 우리는 또 하나의 ‘명예혁명’으로 자부해도 좋으리라.

유신 정권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의 하나는 사상과 인물의 배제 정책이었다. 전 시대의 박 정권은 자신의 권력 행사와 유지를 위해 비판자와 그들의 발언을 ‘일부 불순분자’의 것으로 규정하여 분리하고 거친 반공주의로 다양한 자유정신들을 구속했다. 많은 지식인들과 숱한 노동자들이 그 논리에 갇혀 진보와 혼동한 ‘좌파’로 축출당했고 정치적 이의와 저항은 흑백논리로 통제되었다. 그의 딸 역시 문고리 인사들을 선택하여 공적 정책들을 수렴(垂簾) 안으로 숨기고 비판자들을 ‘블랙리스트’로 제외하며 ‘나쁜 사람’이란 ‘아기말’로 찍어냈다. 그들은 비슷한 심술로 민주주의의 다양한 정신과 자유로운 표현을 억제했고 ‘내 편’의 인연으로 파당 인사를 했다. 이 분할-통치의 배제 정책은 경제적, 지역적, 이념적, 세대적, 직능적 갈등들과 얽혀 우리 앞날에 부정적 유산으로 작용할 것이다. ‘촛불’ 민주주의는 그 적폐에 대한 시민의 평화적 저항이고 정치적 성숙을 향한 지적 염원이었다.

식민통치와 6·25의 전후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1960년대 각성의 시기가 품었던 인식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내가 바라는 것은 우리의 미래 지향을 질적 행복의 경제학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가 가장 괴로워하는 불평등의 문제들, 못 가진 자의 슬픔, 강제당하는 을의 억울, ‘헬조선’으로 탄식하는 젊은이들의 자멸감, 5포 세대의 절망은 두 세대에 걸친 개발경제의 양적 성장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삶과 기회의 공평성에 소홀하며 행복의 정책을 외면하는 한, 물적 발전도, 민주주의의 일상화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도 무의미하다. 그것은 이제 박정희식 근대화의 성장 프레임이 시효를 다하고 전 시대적 발전 이데올로기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성장을 위한 성장’을 ‘행복을 향한 선택’으로 바꾸어 경제 발전의 진의를 성찰하며 사회적 복지 추구권과 삶의 문화적 향수권 등 평등의 실제를 추구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적 비만 못지않게 즐겁고 의미 있는 삶의 겸손을 바라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유소년 시절에 말로만 배운 민주주의가 전쟁과 쿠데타, 유신과 억압 속에서도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실현되던, 힘들지만 뜨겁고 집요한 우리 역사의 의지를 보아왔다. 1960년의 4·19 총성과 80년대의 최루탄을 거쳐 2010년대의 촛불 축제 속에서 이제 새로운 희망으로 민주주의적 정치 선진화와 평등주의적 경제 발전의 미래를 기대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지금 ‘인간의 얼굴을 한’ 거버넌스로 행복의 정치경제학을 약속하는 인물에게 내 귀중한 한 표를 드릴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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