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팽목항 가는 길에 비가 왔다. 5일 목포역에서 자동차를 타고 팽목항으로 갔다. 목포대교를 건너 고하도, 허사도, 금호도, 그리고 섬 사이사이 다시 연결되는 뭍을 이은 몇 개의 다리를 건너 진도대교를 넘었다. 진도에서도 남서쪽 아래 팽목항까지는 또 한참을 가야 한다. 길옆으로 비 맞은 매화가 늘어섰다. 3년 전,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속을 하고서 엄마들이 달렸을 그 길이다. 그 마음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짐작해 보려 했으나, 감히 닿지 못했다. 라디오를 듣는 것마저 죄스럽게 느껴지는 길이다. 팽목항에 왔다. 빨간 등대가 있는 방파제에 설치된 세월호 리본 상징물 단상은 제수상이 되었다. 초코파이, 땅콩샌드, 바나나우유 등 아이들이 좋아했을 군것질거리들이 그득하니 쌓여 비를 맞고 있다. 세월호 가족들이 거처하는 컨테이너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문을 두드렸다. 이웃 주민 이원식씨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세월호가 목포항에 도착하자, 아이들 찾으러 그곳으로 떠났다. 대파 농사를 한다는 30대 후반의 원식씨는 “형님들(유족들) 돕는 사람”이라며 “대파 필요하다면 갖다주고, 외지 분들이라 뭐 하나 구하려도 어디 가야 되는지 모르니 가르쳐 드리고”라고 했다. 직장 그만두고 이곳에 내려왔던 유족들은 가끔 원식씨 소개로, 농사일이나 인근 ‘잡부’로 일당을 받고 일도 했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 아버지 두 명은 자식 떠난 바다 보이는 팽목에 아예 정착해 집 짓고 산다고 한다. 팽목항에 오면, 다들 죄인이 된다. 사회적 영향력과 죄스러움은 비례할 것이다. 사회와 호흡하는 기자에게, 팽목항은 저널리즘의 기본을 다시 일깨운다. “공중은 지금도 뉴스는 독립적이고, 믿을 수 있어야 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생산해야 한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빌 코바치, 톰 로젠스틸의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3년 전 104살로 돌아가신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6살 때 병으로 숨진 내 삼촌 이야기를 종종 어제 일처럼 읊조리듯 하곤 했다. 열이 펄펄 끓는 막내아들 둘러업고 새벽 의원 문 두드리던 60년 전 이야기를. ‘쓰는 자’ 기자로서, 팽목항 방파제에 붙어 있는, 가족들이 그림과 함께 새겨넣은 타일 속 글 일부를 전한다. “홍승아! 엄마 아들로 태어나줘서 엄마는 너무 행복했어”, “엄마 딸 서우, 꿈에라도 한번 와줬으면 좋겠어”, “내 형아가 되어주어서 고마워!! 형아 사랑해!”, “천국에서 그림 많이 그리고, 엄마 만나면 보여줘”, “민지야! 엄마가 한번 안아주고 싶다”, “똥강아지 정다혜 사랑해”, “쏴랑하는 우리 아들 농구하러 가자~ 빨랑 와”, “이상아! 엄마 걱정하지 말고 씩씩하게 잘 지내”, “늘 웃어서 째보, 늘 사랑한다 말해서, 껌딱지 아들” 미수습자 가족들의 글이다. “엄마랑 이젠 집에 가자”, “보고 싶고 만지고 싶습니다”, “세월호 속에서 엄마를 얼마나 찾았을까요”, “따뜻한 밥 해서 같이 먹고 싶다”, “4대 독자 우리 아이, 살려달라 하지 않아요. 아이만 찾을 수 있다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평생 봉사하고 살 거예요. 가난해도, 부모 노릇 못해도, 불평 없이 살아온 아이, 형체 알아볼 수 없어도, 꼭 찾아 한 번만이라도, 부둥켜안아 보고 싶어요”, “다윤이 보고 싶다. 내 딸 냄새라도 맡고 싶어”, “축구를 좋아했던 영인이는 축구화를 사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못 사줬던 축구화를 사서 팽목항에 두고 영인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ho@hani.co.kr
팽목항 방파제 중간에 놓인 단상에 아이들이 좋아했던 초코파이와 과자 등이 제삿상처럼 차려져 있다.
방파제 한쪽으로 가족들과 친구들이 글과 그림을 넣은 타일이 빼곡히 박혀 있다.
팽목항 방파제 끝에 있는 등대
미수습자인 단원고 학생 영인이 어머니가 걸어놓은 플래카드
팽목항 추모관에 세월호 희생자들의 영정이 나란히 놓여 있다.
세월호 가족들이 지냈던 팽목항의 컨테이너 박스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가 저 멀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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