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2014년 언젠가부터 문화예술계에 괴이한 일들이 벌어졌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심상찮은 문학지원 사업 변경과 창작지원자 축소.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현장예술인교육지원사업 느닷없는 폐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은 순수문학’으로의 문학나눔 선정기준 변경 시도. 그리고 편파적인 세종도서 문학나눔 작품 선정. 우리는 예술기관들의 이 같은 행정처리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에 항의하는 우리에게 해당 기관에서 들려준 대답은,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짓을!’이었다. 염려는 해소되지 않았지만, 저들이 강경하게 뻗대었으므로 우리는 한발 물러섰다. ‘그래, 세상이 달라졌는데,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겠어?’ 이것이 당시 우려를 벗고자 하는 우리의 변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설마’는 이미 무서운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 고사 작전인 블랙리스트가 행정실무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통제와 감시, 배제와 차별의 진보 문예 살생부가 유신정권 30년을 건너뛰어 되살아났음을 우리는 그때 미처 깨닫지 못했다. 최근 밝혀진 기사에 따르면, 심지어 저들은 블랙리스트 예술인과 단체들의 돈줄을 죄기 위해 국세청 공시 양식까지 바꾸었다고 한다. 두렵고 끔찍하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는 법적으로, ‘헌법상 보장된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및 예술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직권남용’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기정보 결정권을 침해하는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행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국헌 문란 행태인 것이다. 나는 여기에, ‘문화예술인들의 자기검열과 모멸감’을 덧붙이고자 한다. 이 또한 민주주의와 헌법 질서의 파괴에 버금간다고 보는 것이다. 자기검열은 필연적으로 상상력을 옥죄어 창의적인 작품 생산을 막아버린다.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출구를 닫아거는 셈이다. 어찌 그 죄가 가벼울 수 있으랴. 모멸감은 또 어떤가. 스스로를 모자라고 불필요한 자로 낙인찍게 만들어 예술가의 자기 정체성을 구렁텅이에 빠뜨린다. 예술가의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으므로 이 또한 가벼이 볼 죄가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한 언론인과 작가 등 지식인들을 엄격하게 처벌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대중 영향력이 큰 저 문화예술인들을 궁지에 몰아넣어 상상력을 옥죄고 능멸한 자들을 엄격하게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김기춘과 조윤선, 신동철 비서관의 구속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이참에 뿌리까지 다 들어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들을 직접 차별하고 배제한 실무 기관장들의 죄과가 은근슬쩍 가려져서는 결코 안 된다. 모든 행정처리가 이들 기관장의 지시와 동의 없이는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참으로 당황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조직 인사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 인사권이라니. 그 알량한 사과 표명으로 예술인들의 뼈아픈 상처가 아물 거라 여긴 것일까. 조직을 추스르고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고자 했다면 위원장이 먼저 물러나는 게 옳다. 혹여 자신은 자리를 지키면서 부하 직원들에게 책임을 물었다면 이는 인성이 사라진 짓이다. 위원장이 자리에 연연할수록 예술위의 위상은 떨어지고 직원들은 괴롭다.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뜨겁게 빛나는 예술 세계는, 블랙리스트라는 희대의 악령을 제대로 물리친 다음에라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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