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철
지역에디터
“아니, 입이 왜 그래?”
2년 전 권투 도장에서 첫 스파링을 한 뒤 집에 갔더니 아내가 무척 놀랐다. 나는 마우스피스 없이 스파링하다 맞아 입술이 터졌다고 이실직고했다. 아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내를 위로한답시고, 스파링 상대가 20대 초반이라 힘이 좋고 워낙 빨라 내가 일방적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 상황이었다고 부연설명을 했다. 금세 아내의 표정이 ‘어이없다’에서 ‘한심하다’로 변하더니 쏘아붙였다. “그 나이에 아들 또래한테 얻어맞고 다니고 싶냐? 당장 권투 그만둬!”
그런데 당시 부상은 보이는 입술보다 안 보이는 머릿속이 더 심했다. 스파링을 할 때 헤드기어를 착용했지만 상대에게 훅과 스트레이트를 몇대 맞았더니, 머릿속에서 보신각종 타종 때처럼 띠잉~~ 소리가 며칠 동안 울렸다. 하지만 아내에게 ‘내 머릿속에 보신각종이 울리고 있다’고 털어놓을 순 없었다.
스파링을 하는 권혁철 에디터(왼쪽)가 왼손 잽으로 상대를 견제하고 있다.
나는 ‘권투를 그만두라’는 아내의 ‘지시’를 어기고 지금까지 권투를 계속하고 있다. 덕분에 ‘덕기자 덕질기’에 등판하는 기회도 얻었다. 사실 나는 덕기자를 자처하기엔 턱없이 모자란다. 프로복서 자격증을 얻거나 생활복싱체육대회에서 입상한 것도 아니다. 지난 2년 동안 고작 1주일에 사나흘 1~2시간씩 권투 도장에 가고 어찌 ‘복싱덕후’라고 하겠는가. 권투 제대로 하는 분들이 보기엔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나는 복싱덕후는 어림도 없지만 그동안 권투를 꾸준히 하려고 애썼다. 나는 평일 회사 안에서 하루 평균 12시간가량 일해야 한다. 주중에 3~4번 권투 도장에 가기도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년간 권투를 해온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다. 몇 년 새 멀쩡해 보이던 내 또래들이 갑자기 숨지거나 크게 아픈 경우를 자주 봤다. 애초 권투 입문 동기가 ‘생존체력’ 단련이기에 나는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꾸준히 하자’는 마음가짐으로 권투를 한다.
스파링을 하는 권혁철 에디터(왼쪽)가 오른손 스트레이트 공격을 하고 있다.
나는 50대에 접어들어 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면서 ‘체력이 창조적 노동의 원천’이란 생각을 자주 한다.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에 따라 사고 능력도 미묘하게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사고의 민첩성, 정신의 유연성도 서서히 상실됩니다. 나는 어느 젊은 작가와 인터뷰할 때, ‘작가는 군살이 붙으면 끝장이에요’라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기자가 군살이 붙으면 끝장’이란 각오로, 밤 10시께 서울 공덕동 한 권투도장에서 줄넘기, 섀도복싱을 하고, 샌드백을 친다.
nu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