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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수구 난동과 이면헌법 / 고명섭

등록 2017-03-07 17:19수정 2017-03-07 18:55

고명섭
논설위원

대통령 탄핵 정국에 등장한 사진 가운데 가장 기괴한 사진 한 장을 고르라면 이것이 아닐까. 승복 차림의 한 남자가 방패 모양의 팻말을 들고 서 있다. 팻말에 쓰인 글귀는 ‘빨갱이는 죽여도 돼’. 그 승려의 머릿속에서 ‘불살생’의 계율은 증발한 지 오래인 듯하다. 더 오싹한 것은 승려의 좌우에서 사진을 찍는 포즈를 취한 두 남자의 모습이다. <문화방송>(MBC) 보수 노조의 공동위원장인 현직 기자와 아나운서다. 이 사람들에게 저널리즘 윤리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인 듯 보인다. 살인 구호를 가운데 놓고 웃음을 띤 채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에게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다.

이 타자화의 주술이 탄핵 반대 집회를 휘감고 있다.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들, 촛불을 든 사람들은 종북세력이 되고 척결 대상이 된다. 군복을 입은 남자는 유력 야당 정치인의 목을 딸 준비가 돼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충북의 한 도의원은 탄핵에 찬성한 국회의원 “미친개”들을 “사살해야 한다”고 극언을 한다. ‘탄핵기각 국민총궐기운동본부’ 공동대표라는 사람은 헌재가 탄핵을 인용하면 “참극을 보게 될 것”이라고 협박한다. 촛불시민을 폭행하고, 부상자를 실은 구급차를 막고 주먹을 들이대는 일이 백주에 벌어진다.

이 사람들은 뭘 믿고 이렇게 날뛰는 걸까. 백낙청 교수가 <창작과 비평> 봄호(2017)에 발표한 글(‘‘촛불’의 새 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은 탄핵반대세력을 뒤에서 받쳐주는 것이 다름 아닌 ‘이면헌법’이라고 말한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 성문헌법 위에 눌러앉아 법 조항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바로 이면헌법이다.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와 대치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을 들먹이며 국민의 권리를 축소하고 제약하는 우리 사법 현실이 이면헌법의 존재를 말해준다. 이면헌법은 ‘빨갱이로 몰린 자에게는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관습헌법이다. 누구든 빨갱이 낙인이 찍히면 국민의 자격을 상실하고 기본적 권리를 박탈당한다.

이면헌법은 이 나라 수구세력의 가장 강력한 지배도구다. 박근혜 일파가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고 초법적으로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이면헌법을 믿었기 때문이다. 거리의 탄핵반대세력이 아무에게나 종북 딱지를 붙이며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것도 믿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군대여 일어나라” 따위의 내란 선동이 현행법에 걸리는 행위라는 것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다. 내란 선동은 ‘빨갱이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애국보수’와는 무관한 일이다. 이 나라가 정상국가가 되는 길을 가로막는 장벽 구실을 해온 것이 이 무책임과 비이성을 허용하는 헌법 위의 헌법, 이면헌법이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면, 탄핵반대세력이 내지르는 살벌한 말들은 역으로 이 세력이 속으로 얼마나 위축돼 있는지 방증한다. 그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 성조기까지 등장한 탄핵 반대 집회의 풍경이다. 자기 나라 대통령을 살리겠다고 남의 나라 국기를 흔들어댄다.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가는 유아처럼 더 큰 힘에 매달리는 목불인견의 의존증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풍경은 박근혜 일파의 국정농단이 끼친 파괴적 영향이 이면헌법의 지배력까지 흔들었음을 알려준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를 짓눌러온 이 유구한 관습헌법의 위력이 언제든 복원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남북 대치와 긴장을 생존과 번영의 에너지로 삼아온 수구세력은 분단체제가 계속되는 한, 그리고 이면헌법이 존속하는 한 죽지 않는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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