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우익의 ‘반공’은, 사실상 ‘평등에 대한 반대’이다. 그들에게 ‘빨갱이’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만이 아니라 더 많은 평등을 요구하는 사람들 전부다. 우익의 세계는 모든 것이 우열화되어 줄 세워져 있는 우주다. ‘태극성조기’는 그런 정신세계의 도상학적 표현이다. ‘태극성조기’는 그저 이렇게 묻고 있을 뿐이다. “난 힘센 놈한테 붙었는데 넌 누구 편이지?”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며칠 전 종로를 걷다가 소위 “태극기 집회”를 목격했다. 간간이 청년들도 있었지만 “탄핵 무효”를 외치는 이들 대부분은 노인이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생경하고 섬뜩한 언어가 육박해온다. 정치 구호라기보다 욕설과 협박에 가깝다. 듣자하니 2월25일 집회에선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겨냥해 “당신들 안위를 누구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발언이 나왔다고 했다. 대개의 시민들은 눈길을 주지 않고 총총 스쳐간다. 마뜩잖아하는 눈으로 시위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보인다. 갑자기 “잘한다!”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옆을 보니 말쑥하게 차려입은 노신사 둘이다. 시위 참여자는 아닌 듯 길가에 서서 집회를 구경하고 있다. 이들은 방백하듯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하여간 빨갱이, 전라도 놈들 싹 다 북한 보내버려야 돼. 그놈들은 김대중이한테 ‘선생님’ 소리 안 붙이면 귀싸대기부터 날린다면서?” 두 노인의 증오가 순식간에 나를 14년 전인 2003년 삼일절 시청 광장으로 데려갔다. 당시 나는 수습기자였고 집회 현장을 취재하고 있었다. 주최 쪽 추산 60만 인파가 모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귀청이 떨어질 정도의 음량으로 미국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흘러나왔다. “좌경세력 척결”을 위한 구국기도회가 시작되었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연단에 섰다. “공산주의자들은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계 어느 곳에는 사람으로 진화하고 있는 원숭이가 있어야 합니다!” 이어진 삼일절 국민대회. 방송인 봉두완씨가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총재를 소개하며 호기롭게 외쳤다. “여러분, 이철승씨는 전라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입니다!” 해방정국을 제외하면, 대규모 우익집회는 아마 저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청년 우파”들이 우후죽순 인터넷 매체를 만들면서 넷우익 세력으로 가시화한 최초 시점도 그때였다. 돌아보면 지금 거리의 우익들이 보여주는 거의 모든 ‘스타일’이 생겨났다는 점에서 2003년 삼일절 우익집회는 일종의 ‘티핑 포인트’라 할 수 있었다. 집회를 취재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참가자들이 하나같이 손에 든 태극기와 성조기였다. 태극기는 늘 성조기와 한 쌍이었다. 2017년 우익집회도 마찬가지다. 지금 벌어지는 시위를 많은 언론들이 “태극기 집회”라고 부르지만 틀린 표현이다. 대한민국 우익의 깃발은 오래전부터 태극기가 아니라 ‘태극성조기’였다. 촛불집회가 2002년의 ‘깃발 내려!’ 논란에서 2017년 ‘천하제일 깃발대회’로 변해온 동안 우익집회는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왜 거리의 우익들은 미국 국가를 틀어대고 ‘태극성조기’를 드는가? “친미”니 “숭미”니 하는 말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런 건 이미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문제는 그런 외설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는 사고의 양식, 즉 망탈리테(mentalit?)다. 이들이 공공연히 표방하는 이념을 살펴보자. 한국 우익을 특징짓는 이념은 크게 반공주의, 가부장적 권위주의, 그리고 호남차별주의이다. ‘경쟁’을 늘 강조하긴 하지만 자유주의나 시장경제 옹호를 한국 우익의 대표 이념으로 꼽기는 어렵다. 공정 경쟁의 토대가 아니라 몇몇 재벌의 안위에만 관심이 있는 까닭이다. 민족주의 역시 저들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반민족주의나 식민주의에 더 가까울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한국 우익의 핵심은 반공주의다. 이는 공산주의나 공산당에 대한 적대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한국 우익의 ‘반공’은 사실상 ‘평등에 대한 반대’이다. 그들에게 ‘빨갱이’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만이 아니라 더 많은 평등을 요구하는 사람들 전부다. 우익의 세계는 모든 것이 우열화되어 줄 세워져 있는 우주다. 또한 생존에 대한 공포가 행위의 유일한 동기인 정글이다. 여기서는 합리성이나 정당성이 평가절하되고 힘에 대한 숭배가 판친다. ‘태극성조기’는 그런 정신세계의 도상학적 표현이다. 그것의 기능은 공동체에 대한 경의나 구성원으로서의 명예 같은 추상적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태극성조기’는 그저 이렇게 묻고 있을 뿐이다. “난 힘센 놈한테 붙었는데 넌 누구 편이지?” 이런 자들과 공동체를 함께 영위한다는 건 확실히 고생스런 노릇이다. 어쩌겠는가, 싸우고 설득하며 앞으로 나아갈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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