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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민편집인의 눈] 진보언론의 얼음 깨기 / 김예란

등록 2017-03-01 15:18수정 2017-03-01 21:32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꽤나 매력적이면서 성숙한 학술적 개념 중 하나는 애매성이다. 애매성은 흑백논리로 분명하게 잘라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단어다. 애매한 것은 그 불가해함 때문에 종종 우리를 당혹하게 하지만 동시에 성급하거나 억지스런 판단을 피하도록 하는 인내심을 허용한다. 사안의 복잡성을 한걸음 거리를 두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지혜로움을 주기도 한다. 또한 애매성은 미지의 덩어리 안에 어떤 변화가 촉발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기에 실험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애매성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화가 가능하고 필요한지, 그 실체화의 방식과 효과에 관해 세심하고도 열린 사고가 요청된다.

극단의 논리가 겨루는 탄핵 정국에서 애매성의 영역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문제는 진보 언론으로서 <한겨레>의 향후 발전 방향과도 연관된다. 한국 사회의 진보 언론의 위상을 건실하게 다져온 <한겨레>는 정치적 위상은 뚜렷하게 구축했지만 그에 비해 사회적 영향력 면에서 대중적인 권역을 넓게 형성하지는 않았다. 본래 전위란 면적이 아니라 강도로 평가되어야 하는 위치성이긴 하다. 그렇지만 언론 산업의 격심한 시장 경쟁에서 버텨야 하는 언론사로서는 대중적 지지의 폭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더욱이 정치적 차원에 있어서도 <한겨레>가 현재의 진보적 강도와 방향을 유지하면서 사회적 영향력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은 퍽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진보 진영 외곽에 존재하는 다수의 다양한, ‘애매한’ 사람들과 침묵의 얼음을 깨고 관계를 열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겨레와 보수

<한겨레>는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보수적인 경향을 지지하다가도 진보에 찬성하기도 하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 대해서 대체로 무관심하다. 예를 들어 (국정원 대선개입 논란 속에 있는)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2012년 박근혜 후보는 51.6%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지만 2016년 총선은 여소야대의 국회를 낳았다. 한편 사년 전 과반수의 유권자들은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그중 상당수는 지금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고 있다. 이렇듯 변덕스러운 동시에 준엄한, 애매하다고밖엔 표현하기 어려운 이 집단은 보수 엘리트층으로부터 평범한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이질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상황에서 <한겨레>는 주로 진보 진영에 충실한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다수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말 걸고 설득함으로써 서로가 협의할 수 있는 접점을 넓혀가야 한다. 그러면서 정치적 합의와 공공성을 도출하는 지도력이 요청된다. 이처럼 유연하고도 포용적인 태도는 정치 이념의 진보-보수라는 단순한 기준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복잡다단해지는 현재, 나아가 미래 사회에서 더욱 필요한 덕목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진보가 원하는 어떠한 사회 변화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탄핵 정국에서 <한겨레>가 주로 포착하는 보수의 이미지는 박사모의 억지스런 고집과 협박, 그리고 혐오와 추태로 얼룩진 태극기 집회의 장면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그저 한 인물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은 한 나라의 정치 발전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오래된 교훈을 상기시켜 주는 우스꽝스러운 일화로 보고 넘기면 충분하다. 대신 그 표상들 이면에, 사회 전반에 강고하게 현존하는 보수와 함께 그 주변에 광범하게 퍼져 있는 애매성의 실체들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 중요하다. 애매성의 실체란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평범한 모습 그대로 주권의 주체인 시민들이다. 이들은 나도 당신도 때때로 그러하듯이, 이념적인 위치를 고수하기보다는 실질적인 이해관계와 욕망에 따라 그때그때 입장을 취하기에 지극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다.

보수는 구획이 고정된 추상적 범주가 아니다. 구체적인 맥락마다 민첩하게 갈리고 애매하게 뭉치며 보수가 만들어진다. 또한 보수는 역사적 현실에 맞추어 끊임없이 진화하며, 어떤 점에서는 진보보다 더욱 성공적으로 생존력을 강화해왔다. 선구적인 문화학자인 스튜어트 홀의 저 유명한 ‘신자유주의의 혁명’의 표현을 빌린다면 ‘보수의 혁명’은 한국 사회를 주도해온 중요한 세력이다. 반면 보수를 시대착오적인 허상으로 축소하면서 그에 대해 무지와 무시의 적대적 태도로 일관한다면, 역으로 진보 언론이 스스로 자기 한계 안에 갇히는 실책에 빠지기 쉽다. 조화이든 대결이든 상대를 잘 알아야, 그 관계에서만이 내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전환기의 <한겨레>, 비판과 희망

탄핵 정국이라는 변동 국면은 <한겨레>에 중요한 발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만 보수로부터 애매로 이어지는 광범하면서도 역동적인 집단을 분명하게 인지하여 한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지님으로써 탄핵 정국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 명석한 예지를 지닐 수 있을 때만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한겨레>와 상호이해가 가장 낮게 형성된 지점이 보수로부터 이어지는 애매한 다수와의 관계다. 진보 언론이 이러한 보통의 현실과 대화하지 못한다면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자기 안으로만 파고들지 말고 외연을 넓힘으로써 자신과 사회의 변화에 조응하며 성장하는 진보 언론이 되어야 한다.

애매성과 관계 맺기는 여러 형식을 취할 수 있다. 하나는 현실 비판이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국의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의 한 달가량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트럼프 시대를 어떻게 버틸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매 순간 깨어 있고 저항하라”고 제안한다. 또 하나의 방식은 희망에 있다. 희망은 아직 여기에 없는 변화를 상상하고 기약하며 추진해가는 강렬한 힘이다. 스튜어트 홀은 앞으로 올 시간에서 미리 주어지거나 정해진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의 유명한 표현인 “보증 없는” 상황이기에 오히려 새로움을 만들어나가는 창발성의 힘 역시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필자에게 약속되었던 시민편집인 기간 일 년이 꼭 채워졌다. 그간 세상은 상상조차 못했던 방식으로 급전했으며 지금도 거세게 요동치고 있다. 미리 정해진 것도, 보증된 것도 없었던 상태에서 애매한 다수가 발휘한 비판과 희망의 힘으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 이 과정에는 분명히 <한겨레>의 역할 또한 유의미했다. 미정의 시간에서 역사를 만드는 급진적인 동력으로서 <한겨레>의 변함없는 역할을 기대한다.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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