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 희비극의 광풍에 대한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말은 권력과 예술의 관계에 정곡을 찌르고 있다: “예술가들이 자유를 통해 높은 개인적 성취를 이루는 한, 우리의 예술가들이 진정성과 자신감을 가지고 창작의 자유를 누리는 한, 건강한 진보가 이루어지며 건강한 논의들이 개진될 것입니다. 예술가가 정권의 도구이자 노예가 될 때 그리고 예술가가 정치적 대의를 선전하는 선봉에 설 때 진보는 발목을 잡히고 그 창의성과 천재성은 파괴되고 맙니다.”
문학평론가 지난가을 동네 카페에서 하릴없이 스마트폰을 주물럭거리던 끝에 들어가 본 자기검색에서, 내 이름에 ‘블랙리스트’란 말이 붙은 걸 보았다. 뭔 일? 신기해서 열어보니 가나다순으로 나열된 그 명단 중 ‘세월호 시국선언 문학인 754명’ 속에 내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제야 2014년 봄, 작가회의의 선언문 발표 연락이 왔고 나도 동의했던 일이 생각났다. 리스트에 들기도 참 수월하군, 혀를 차며 한 일 없이 이런 명단에 오른 것을 신기해하다가 문득 한 해쯤 전에 있었던, 의아스러워 화를 냈던 사건이 떠올랐다. 으레 만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임이 떠들썩해질 참에 문학과지성사 주일우 대표가 서명해 달라며 용지 한 장을 내놓는데 문체부의 나도 모를 무슨 서훈에 본인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손해 볼 일은 아닌 듯해 더 묻지도 않고 서명했는데 그로부터 10분이나 되었을까, 문체부라면서 그 동의서를 내지 말아 달라는 전화를 해왔다. 왜냐는 질문에 승인될 것 같지 않아서라고 했다. 바라지도 않은 훈장으로 덕 볼 일도 아닐 것이어서 시원스레 그러지요 하고 그 용지를 버렸다. 자리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면서 공무원의 뜬금없는 전화가 못마땅해졌다. 다음날 어제의 통화자와 접속에 성공하자(스마트폰의 찬탄할 기억력!), 서훈의 결정권자는 문체부 아니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 당신들이 탈락시키면 될 일을 당사자에게 전화까지 해가며 원천 봉쇄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당당하던 그의 처음 기세는 웅얼웅얼 졸아들었다. 나는 그 이름까지 들어두고는 무례한 과잉친절과 어설픈 업무 처리를 힐난하는 것으로 마감해버렸다. 바로 그 일이 문제의 ‘블랙리스트’와 연관되지 싶어진 것이다. 나는 별일 한 것도 없이 ‘검은 훈장’의 명예를 얻은 것이 민망해서 작가회의의 집단소송에 참여할 엄두를 버리고 대신 <문화적 냉전>이란 흥미로운 책을 펼쳤다. ‘냉전’이란 말은 소년 시절부터 들어온 상투어였고 그 심각한 체제를 무감하게 살아왔기에 정작 ‘동서’가 아닌 <문화적 냉전>은 생소한 만큼 흥미롭게 다가왔다. 영국의 언론인 프랜시스 손더스가 쓴 두툼한 이 논픽션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국제적인 지성지로 이름난 <인카운터> 등의 교양지 발행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자금 지원 덕분이었다는 사연을 치밀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패전국 독일과 베를린을 미-영-불-소 4개국이 분할 통치하는 가운데 특히 미국은 소련 공산주의의 침투를 방어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나보코프(소설가 나보코프의 사촌동생이다)와 조셀슨을 중심으로 베를린에서 ‘세계문화자유회의’를 조직하여 서구 지식인 사회에 반공의 벽을 쌓고 유명한 지성인들을 동원하며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전파하는 데 막대한 경비를 썼다. 60년대의 내가 세계적인 문필가로 스티븐 스펜더, 이사야 벌린, 아서 쾨슬러(케스틀러), 시드니 훅 등 저명한 필자들의 이름을 본 것이 그 잡지에서였다. 그런데 그 필자들과 편집자들은 대체로 1920~30년대에 좌파로 경사되었다가 독소협정, 스탈린 전체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전향한 진지한 우파 지성들이었다. 이 책의 옮긴이 유광태 임채원은 각주에서 <1960년을 묻다>(권보드래, 천정환)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에서 “세계문화자유회의와 연관이 깊은 잡지로는 <사상계>가 알려져 있었다”란 설명을 덧붙였다. 그게 궁금하여 이 잡지 편집장이었던 손세일 선생에게 문의하니, 그럴 수 있을 정황이 상정되긴 하지만, 우리 경우 ‘동서의 냉전’ 상태라기보다는 6·25 휴전의 ‘무력 대치’ 상태였기에 굳이 ‘사상적 장벽’을 겹으로 세워야 할 정도였는지 그 실상은 모르겠다고 했다. 모든 데서 가난했던 우리나라는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을 비롯해 각급 학교 교과서들의 출판에 외국의 기관이나 재단의 원조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문제의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지부’가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1967년 가을 불문학자 김붕구 교수가 ‘작가의 현실참여’를 발표한 모임의 주최가 그 한국 지부였고 나는 기자로 그 발표를 요약 보도한 데 이어 이호철, 김현 등을 동원하여 순수/참여 논쟁을 유도했기에 그 독특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즈음의 구미 지식사회에서는 이 조직이 해체되고 있었다. 그해 봄 <램파츠>가 시아이에이의 비밀첩보 활동을 기사화하면서 문화자유회의에 자금을 대 ‘지식계의 나토(NATO)’를 만들었다고 폭로했고 이어 <뉴욕 타임스>가 ‘스티븐 스펜더, <인카운터> 편집장 사임’을 1면에 보도하면서 이 단체와 그 잡지는 결국 슬그머니 사라지고 만 것이다. <문화적 냉전>은 ‘화이트 리스트’로 꼽을 세계문화자유회의의 전말에 이어 매카시즘 광풍으로 ‘동서 이데올로기 냉전’의 뒷이야기를 잇는다. 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은 서구로 세력을 확장하며 원폭 제조에 성공한 소련과 공산주의를 새로운 공포 대상으로 여겼다. 그런 가운데 상원의원 매카시가 1950년 2월의 한 연설에서 종잇장 하나를 흔들며 “여기 국무부에서 활동하는 빨갱이 205명의 명단이 있다”고 협박했다. 그 살벌한 분위기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더욱 기승했고 그가 발의한 법은 관계, 학계, 예술계 전반에 살벌한 공포 분위기로 싸안았다. “논리적인 이론이나 근거 없이 정적을 비난하거나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는”(강준만, <미국사 산책 7>) 이 악법은 한국전과 동서 냉전의 바람을 타고 더욱 극성스러워져 각계의 친공 리스트로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채플린, 피카소의 예술계와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 폴링 등 저명 과학자들에게 마구 혐의를 걸었다. 그러나 매카시가 흔든 종잇장은 연방수사국(FBI)의 단순한 안보 관련 체크리스트에 불과했고 그가 빨갱이로 몬 육군 장성 때문에 열린 청문회에서 그의 허세와 거짓이 여지없이 밝혀지면서 매카시법의 공산주의자 검거 선풍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는지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그 법으로 기소된 중요 인사들 중 유죄 판결자가 한 명도 없었던 그 희비극의 광풍에 대한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말은 권력과 예술의 관계에 정곡을 찌르고 있다: “예술가들이 자유를 통해 높은 개인적 성취를 이루는 한, 우리의 예술가들이 진정성과 자신감을 가지고 창작의 자유를 누리는 한, 건강한 진보가 이루어지며 건강한 논의들이 개진될 것입니다. 예술가가 정권의 도구이자 노예가 될 때 그리고 예술가가 정치적 대의를 선전하는 선봉에 설 때 진보는 발목을 잡히고 그 창의성과 천재성은 파괴되고 맙니다.” 매카시는 청문회에서 참담하게 패배하고 웃음거리가 된 후 알코올 중독으로 49세에 죽었다. 거대한 자유민주주의의 미국도 이 매카시즘 때문에 공산권에 대한 정보와 연구가 위축되어 스탈린 사후 소련의 내부 진단에 어두웠고 스푸트니크 발사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의 1970년대 유신 시절, 운동권 명단에 얹힌 숱한 젊은이들이 당했던 도피와 수배, 고문과 투옥의 고통은 오늘날에도 속 쓰린 트라우마가 되고 있다.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은 권력이 다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문화 예술계와 지식 사회를 조작하게 되면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는 30년 전으로 되돌아갈 것으로 비판했다. 물론 블랙리스트 통치는 사상의 자유와 다양성을 억제하며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창조경제’ ‘문화융성’을 뒤집어 허물며 유신시대, 나아가 ‘빅브러더’의 전체주의를 부를 것이다. 이야말로 우리 헌정 체제를 무너뜨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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