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한 서고트족의 마차 진지를 재연한 미니어처의 모습. 전쟁사 미니어처 전문가 누리집 ‘레지오 워게임스’ 갈무리.
기원전 1세기, 로마가 갈리아와 이집트를 평정했다. 로마 제국은 거칠고 미개한 ‘야만족’에게 봉토를 내주는 대신 조세를 받고 용병으로 삼으며 융화 정책을 폈다. ‘팍스 로마나’ 시대가 열렸다. 제국의 위기 조짐은 3세기 중반에 찾아왔다. 잦은 전쟁과 권력 암투로 50년 새 황제가 스무 번 넘게 바뀌었다. 제국의 문명과 풍요로움은 주변 이민족들의 동경과 탐욕을 자극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사후 상황이 급변했다. 두 아들이 동부(비잔티움제국)와 서부(서로마제국)를 나눠 가지면서 분할통치 시대가 열렸다. 375년 유럽 동북쪽에서 무시무시한 훈족이 거침없이 남하하면서 게르만족들을 밀어냈다. 서고트족도 로마 제국의 북쪽 경계인 도나우강까지 쫓겨왔다. ‘게르만족 대이동’의 서막이었다.
서고트 족장 프리티게른은 동로마제국의 발렌스 황제에게 “조용히 살겠다, 필요하다면 용병을 제공하겠다, 우리를 받아들여 달라”고 요청했다. 로마의 환심을 사려 기독교로 개종하기까지 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고트족 유입이 급증한데다, 로마의 부패한 군인들이 고트족의 재산과 여인들을 농락하면서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고트족은 로마 침공을 선택했다. 378년 8월, 동로마 황제 발렌스는 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플(오늘날 터키 서쪽 끝)에 주둔한 고트족의 대규모 마차 진지를 덮쳤다. 결과는 로마 군단의 끔찍한 참패였다. 3만명의 로마 병사들이 ‘거대한 살육극’의 제물이 됐다. 황제도 목숨을 잃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이후 로마 제국 쇠락의 신호탄이 됐다. 후대 역사가들은 로마의 가장 큰 패인을 전력이나 전술 차이가 아닌 난민정책의 실패에서 찾는다. 최근 몇 년 사이 유럽 난민 위기에 이어, 요즘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둘러싼 갈등이 위태롭다. 유럽 언론과 식자층에선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교훈을 되새기자는 목소리들도 나온다. 조일준 국제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