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타인의 존엄을 짓밟아선 안 된다는 걸 몰라서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다. “그래 왔으니까” “그래도 되니까” 기꺼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제법 그럴듯하게 갖춰져 있음에도 전혀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인 누구나 알고 있다. 재벌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감옥에 가지 않고, 만약 1등 재벌일 경우 구속조차 되지 않는다.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시발비용’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욕설 ‘○발’을 순화시켜 ‘비용’과 합친 말로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아도 될 비용’이란 뜻이다. 홧김에 마신 술, 열 받아서 먹은 치킨, 힘들어서 잡은 택시…. 이런 소비가 전부 시발비용이다. 이 말이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 건 오늘 우리의 노동이 그만큼 비참하다는 증거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월급을 ‘한 달 동안 모멸을 견딘 대가’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높은 자영업자 비율의 배경에는 이런 요인도 있지 않을까. 자영업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면서도, 어떤 이들은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시달리다 완전히 소진되는 것보다 자영업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물론 창업했다고 지옥을 벗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비합리적인 상사보다 한술 더 뜨는 ‘진상고객’, 업계 ‘갑’들의 복마전이다. 존엄(dignity)의 훼손은 일상이 되었다.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존엄을 짓밟히며 살아간다.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부모들, “10분만 더 공부하면 아내 얼굴이 바뀐다(남편 직업이 바뀐다)” 같은 말을 급훈으로 거는 교사들이 과거에 너무나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많다. 그러니까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학습되고 누적되어온 습속이다. 달라진 부분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늘어났다는 점이다. 인간은 경제적 손실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존엄의 훼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쓴 역사학자 톰슨은 피착취자의 단결과 저항이 경제적 이해관계의 기계적 반영이 아니라 도덕적 정당성, 사회적 인정 같은 요소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 바 있었다. ‘경영 멘토’ ‘인문 멘토’로 불리는 사람들은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말을 써가며 사회의 무자비함을 강조하길 좋아한다. 이들 중 몇몇은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자본주의를 어찌나 준열하게 비판하는지, 거의 반자본주의 혁명가처럼 보일 지경이다. 저들은 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체제나 사회를 마치 자연재난처럼 묘사한다. 자연재난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각자의 적응과 생존 문제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논의는 나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수렴한다. 답은 대동소이하다. 잔혹한 세계를 헤쳐나갈 만큼 ‘강한 자아’가 되는 것, 살벌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식으론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대다수가 존엄하지 못한 사회에서 극소수만 존엄해지는 것, 그건 존엄이 아니라 ‘특권’이다. 나의 존엄을 인정받으려면 타인의 존엄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현실에서 이 원칙이 권력의 작동에 의해 심각하게 침식되고 있음을 안다. 한국 사회에서 유독 존엄의 훼손이 극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말한 오랜 습속과 관성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 제재 수단의 결여다. 사람들은 타인의 존엄을 짓밟아선 안 된다는 걸 몰라서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다. “그래 왔으니까” “그래도 되니까” 기꺼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제법 그럴듯하게 갖춰져 있음에도 그것이 전혀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인 누구나 알고 있다. 재벌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감옥에 가지 않고, 가더라도 금방 특별사면되며, 만약 1등 재벌일 경우 구속조차 되지 않는다. 명시된 법도 지킬 생각 없는 이들에게 “타인의 존엄을 지켜주세요”라고 부탁하면 그들이 ‘아 그랬구나, 우리가 잘못했구나’ 눈물 쏟으며 회개할까? 그럴 거였으면 애당초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테다. 사태가 별반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개별 해법 말고는 대처 수단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혈연·지연·학연 공동체, 종교 공동체는 넘쳐나지만, 오랜 반공주의 등의 영향으로 정당과 노동조합 같은 결사체가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사회다. 이런 결사체는 정부와 자본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할 뿐 아니라 시민 각자의 이해관계를 공적 관심사로 번역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우리의 일터와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건, 5년짜리 대통령이 아니라 체제와 개인을 일상적으로 매개하는 이런 조직들이다. 혼자 존엄할 수는 없다. 오직 같이 존엄해질 수 있을 뿐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