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도 다른 텍스트들처럼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욕망을 담고 있을까. 내면에 스스로 알지도, 통제하지도 못하는 심연이 무의식으로 존재한다는 깨달음이 인간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이루는 전환점이 되었듯이, 어쩌면 언론에도 무의식의 균열이 있다는 인식이 동시대적인 언론 이해의 출발점이 될 수 있겠다.
■ 유명인의 추락, 대중의 쾌감?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과 탄핵정국에서 이른바 박근혜 정권의 핵심, 문고리, 스타로 불리던 정치인과 각계 유명인들이 연달아 구속되었다. 이에 대한 언론의 접근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뉜다.
이성적인 담론은 장기간 누적된 비리와 현재의 국정 불능을 분석하는 합리적 관점을 취한다. 전문적인 법적 용어와 정치 이론이 인용되며 해당인들이 거치게 될 심판 및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합리적 논의가 제시된다. 다른 한편에는 사안의 공공성보다는 개인사에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접근이 있다. 최순실씨가 수감되면서 구치소 독방의 구조에 대해 상세한 정보가 나오고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구치소에 유치될 때 ‘일반’ 입소자들과 동일하게 받은 신체검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제공되었다. 주요 국가기관들의 수장을 지내온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꽃길’만 밟아온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해서는 구속 이후 초췌해진 모습이 유난히 부각되어 보도된다. 공인의 추락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공적인 사안에 대한 공론의 범위를 이탈한다. 감옥 독방에 갇힌 누군가의 신체 구석구석, 삶의 전모에 대한 엿보기의 욕망을 깔고 있다. <한겨레>는 주로 전자의 입장을 취했지만, 후자의 방식도 때때로 내비쳤다.
이 기사를 보는 대중의 심리 역시 언론과 마찬가지로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나랏일을 걱정하고 직면한 정치상황에 대해 온당한 담화를 나누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곤두박질친 유명인들의 인생에 대해 동정, 분노, 호기심 그리고 어쩌면 통쾌함이 섞인 묘한 심정을 품는다. 더욱이 언론은 공공적인 가치와는 거리가 먼 개인들의 ‘나쁜 감정’을 살살 부추기면서 대중의 혼란스런 반응을 더욱 증폭시킨다.
좀 어렵게 표현하면 ‘샤덴프로이데’라고 일컬어지는 이 현상은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인간심리를 가리킨다. 특히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샤덴프로이데는 수용자의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는 효과적인 기제로 활용되어져 왔다. 주로 연예인 스캔들에서 이 현상이 도드라지지만 오늘날처럼 소셜미디어가 발달하고 대중담화가 활발하게 교류되는 세상에서는 정치인 역시 미디어의 샤덴프로이데 작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샤덴프로이데에 대한 더욱 흥미로운 해석은 그 꼬인 대중심리에 담긴 정치적 연원과 관련된다. 사회학자 조 리틀터는 샤덴프로이데가 자유민주주의의 이중성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자유민주주의는 법이 규정한 제도적 영역에서는, 예컨대 투표권처럼, ‘조건의 평등’을 보장하지만 사적 재산 등 경제적 영역에서는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의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경제적 평등’이란 말은 기껏해야 실없는 열망의 대상이거나 하찮은 냉소거리로 취급되기 마련이다. 이 상황에서 만능이라 숭배되던 유명인이 추락하는 사건이 터지면, 사람들은 그가 보여주었던 탁월함이 그의 본질이 아니라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우연의 것이었으며 그의 명예 역시 언제든 교체 가능한 껍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신성불가침의 영광이라고 여겨졌던 것의 신화가 깨지는 통쾌함, 이를테면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라는, 소년의 외침 같은 효과다.
이 점에서 샤덴프로이데는 평등주의의 신화를 깨트리는 정치적 효과를 잠재적으로 지닌다. 그러나 샤덴프로이데가 항상 왜곡된 평등주의를 변혁하는 실행력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성공한 유명인에 대해선 아부하지만 실패한 정치인에 대해선 냉소하거나 조롱하는 식으로, 단순하고 표피적이며 분극화된 감정 표출에 그치기 마련이다. 따라서 탈신화화에 대한 즉시적 쾌감이 실질적인 정치력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단순한 감정의 발산이 아닌,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사회적 행위가 연동되어야 한다.
따라서 핵심은 정치에 작동하는 무의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문제에 있다. 그리고 언론이 노출시켜야 하는 대상은 대중의 무의식이 아니라 권력의 무의식이다. 어떻게 ‘최순실’로 응집된 부정한 정권에 그 많은 정치인들이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말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어째서 한때는 뛰어난 인재였을 그들이 그토록 비겁하고 탐욕스런 부패 권력의 상동체로 파국을 맞게 되는지. 애초에 합당한 정치인 배양 시스템이 부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비선’이라는 음지 권력이 정치 전부를 먹어치우기까지 그에 공조한 정치적 권능, 혹은 그것을 전혀 차단하거나 제어하지 못한 정치적 불능이 모두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치의 비정상적인 권능과 불능이 기괴하게 합체된 권력의 무의식에 그간의 언론 역시 깊숙이 종속되어 있었다.
■ 진실의 레짐에 대한 희망
나는 혼란스러운 현 정국 속에서 미셸 푸코가 말한 진실에 관한 체제, 즉 ‘진실의 레짐’을 떠올린다. 그가 진실의 레짐을 설명하기 위해 언급하는 사례는 놀라울 만큼 간결하고 근본적이다. 두 사람이 논쟁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이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이 점차 바뀌어가고 마침내 그의 주장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진실을 구하고 접하고 마침내 새로운 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 이 사건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다름 아닌 주체가 진실과 맺는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진실에 대한 자발적인 결속, 그 진실을 스스로 표명하고 실행하기. 나아가 진실의 실천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법과 정치로 확장된다고 푸코는 역설한다. 이 논의에서 푸코는 흔히 ‘무의식’의 상징인물로 알려져온 오이디푸스를 진실 실천의 윤리적 주체로 전환시켰다.
언론이 정치적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 상태로부터 벗어나 진실 실천의 주체로 윤리화하기를 바란다. 오늘날 진실의 레짐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언론이다. 정국의 혼돈 속에서 또 다른 부류의 (그러나 실상 기존의 인물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 대권주자들이 권력 욕망을 펴기 시작하는 요즈음이다. 각개 정치인에 대한 감정적 호오나 관음적 집착에서 이제는 언론이 벗어나야 할 때다. 만약 새봄에 새로운 정권이 태어난다면, 불행하게도 지금껏 한국 현대사의 어느 정권에서도 실행되지 못했던 진실의 레짐이 언론의 준엄한 진실 책무 안에서 구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