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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파원 칼럼] 트럼프 아마겟돈 / 이용인

등록 2017-01-26 17:48수정 2017-01-26 20:21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트럼프의 미국’에 공포와 두려움이 깔리고 있다. 밤의 어둠을 타고 내려오는 좀비 같다. 최소한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느낄 것이다. 거칠게 얘기하면 ‘아마겟돈’의 시작이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다음날인 21일 워싱턴 의사당 근처에서 열린 트럼프 반대 집회 ‘위민스 마치’(여성행진)를 취재하면서 미국인들이 권력기관을 의식하는 모습을 흘깃흘깃 엿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너무 익숙했던 풍경이지만, 민주주의를 자랑하던 미국이었기에 생소했다.

집회에 참가한 6명 정도를 인터뷰했다. 3명은 자신의 이름만 밝히고 싶다고 했다. 성도 나이도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인터뷰를 사양한 사람도 있었다.

그동안 미국 진보 진영이 주최하는 집회나 선거운동을 취재할 때 익명을 요구하는 미국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미국인들이 ‘프라이버시’라며 대답하기 싫어한다는 나이와 직업을 물어봐도 척척 나왔다. 더욱이 인터뷰 거부는 없었다. 당당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집회나 민주당 쪽 선거 취재는 다른 취재들보다 좀 편했고, 부담이 없었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름만 밝힌 한 미국인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 시대잖아요.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요.” 트럼프는 이제 권력기관을 손에 거머쥐었다. 미국인들은 본능적으로 권력기관이 자신을 옥죌 수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폐쇄됐던 중앙정보국(CIA)의 비밀감옥(블랙 사이트) 부활을 담은 트럼프의 행정명령 초안이 드러나면서, 이들의 불안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 설치됐던 비밀감옥은 물고문과 수면 제한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어쩌면 한국 기자들도 트럼프 비판 기사를 쓰면서 뒷골이 땅기는 경험을 해야 할지 모른다. 한국에서처럼.

트럼프는 또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 건설 재개를 사실상 승인하는 대통령 메모에도 서명했다. 노스다코타에서 일리노이까지 모두 4개 주, 50개 카운티를 잇는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 건설 사업은 길이 1800㎞, 공사비만 38억달러(4조2천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사업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대선이 끝난 직후 미시간주 취재를 갔을 때 디트로이트의 한 식당에서 만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지지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왜 자신이 송유관 사업을 막기 위해 싸우고 있는지 외국 기자를 붙들고 절절히 호소했다. 미국 주류 언론들조차 자신들을 외면하고 있다고, 다음번에는 당신이라도 꼭 송유관 취재를 와 달라며 눈물까지 보였다.

다코타 송유관 사업은 식수원 오염 가능성 등 환경 문제만 도사린 게 아니었다. 애초 부유층 거주 지역을 통과하기로 했으나, 이들의 반발로 원주민 성지를 지나가는 것으로 파이프 경로가 바뀌었다. 항의 시위에 대한 진압도 최루탄과 고무총, 물대포까지 동원할 만큼 폭력적이었다. 그는 다코타 송유관 사업이 석유자본과 권력의 결탁,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 주류 언론의 기득권 편들기, 공권력의 폭력성 등 미국의 모든 모순의 집약체라고 규정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초 뒤늦게 건설 중단 결정을 내렸을 때, 영하 몇십도의 추위에서 ‘추수감사절 대규모 농성’을 벌였을 그가 크리스마스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이번 건설 재개 조처로, 그는 또다시 미주리강 근처 혹한의 시위장으로 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을지 모른다.

이건 리얼리티 쇼가 아니다. 자신의 경계 밖에 있다면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무조건 타자화하고 적대시하며 제압하고 말겠다는 트럼프 시대의 현실이다.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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