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권력형 비리의 배후를 흔히 몸통이라 부른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최종 몸통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박근혜 대통령일 것이다. 구속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언젠가 말한 바 있다. 자신은 단지 “윗분의 뜻을 받들어서” 일하는 “승지”에 불과하다고. 그러니 블랙리스트 역시 ‘윗분의 뜻을 받들어’ 모신 결과일 것이다. 그렇지만 몸통이라는 단어는 상황의 본질을 설명하기에는 왠지 미흡하게 여겨진다. 그 말은 과거 김영삼 정부 시절 비위 혐의로 검찰에 소환된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 “나는 바람 불면 날리는 깃털에 불과하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이른바 몸통-깃털론이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블랙리스트 몸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깃털도 아니다. 그러기에는 그들이 저지른 죄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그래서 떠오르는 말이 ‘수괴’(首魁)다. 못된 짓을 하는 무리의 우두머리. 이 말이야말로 박 대통령의 역할과 죄상, 그리고 범죄 행각을 벌여온 수하들과의 관계를 잘 표현해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수괴는 단순히 인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법률 용어이기도 하다. 형법 제87조 내란죄에서는 주범을 수괴라 부른다. 사실 블랙리스트 사건은 최순실씨 등 비선 실세들이 대통령의 위세를 등에 업고 저지른 국정농단, 부정비리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청와대 비서실장, 문체부 장관 등 국가의 공조직이 합심해 저지른 심각한 헌법 위반 사건이다. 이 중대 범죄에 직권남용 혐의 정도를 적용하는 것은 부족하다. 그것은 ‘내란죄’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다. 내란죄를 구성하는 요건의 하나가 ‘국헌 문란’이다.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이 국헌 문란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의 핵심들은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을 통해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 등을 깡그리 침해했다. 통상 내란죄는 권력의 바깥 사람들이 헌정 질서를 유린하려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지칭하는데 이번 경우는 반대다. 헌법과 법률을 지키라고 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헌법과 법률을 무너뜨리고 국민을 탄압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니 ‘셀프 내란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내란죄는 혐의 대상자를 수괴, 중요임무 종사자(범죄 모의 참여·지휘 등), 부화수행자, 단순관여자 등으로 나누어 처벌한다.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박 대통령은 수괴, 김기춘 전 실장과 조윤선 전 장관 등은 중요임무 종사자다. 그리고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문화예술인들을 솎아내고 탄압하는 데 일조한 수많은 부화수행자와 단순관여자들이 있다. 이들 역시 앞으로 상응한 법률적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무너진 헌정 질서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김 전 실장 등 중요임무 종사자들이 구속된 마당에 수괴를 어떻게 처벌해야 옳을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다고 본다. 박 대통령은 블랙리스트 사건 하나만으로도 탄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 정도로 끝내도 좋은가. 특검이 내란죄를 적용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없겠지만, 그 정신은 온전히 구현돼야 한다. 이제 ‘박근혜 구속’이라는 촛불 시민들의 구호는 단지 구호만으로 그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박 대통령이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것은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5월이라고 한다. 배가 침몰하는데도 자기만 살겠다고 배에서 탈출한 세월호 선장이 그랬던 것처럼, 박 대통령은 그 참담한 상황에서도 대통령의 인기와 지지, 지방선거 승리라는 ‘젖은 돈’ 말리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세월호 선장은 수많은 젊은 목숨을 바닷속에 수장시켰고, 대한민국호 선장은 이 땅의 정의와 헌법을 검은 바닷속에 수장시켰다. 블랙리스트의 물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박 대통령의 끊임없은 편 가르기와 마주친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포용과 배려, 아량과 관용의 정신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다. 자기편 사람은 어떤 도덕적 흠결이 있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챙기고, 눈엣가시 같은 존재는 어떻게든 없애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편협한 모습만을 보여왔다. 그 증오와 배척이 바로 블랙리스트의 온상이었다. 블랙리스트 수괴에 대한 엄정한 법의 심판은, 이 땅에 다시는 그런 옹졸하고 치사한 국가 최고지도자가 출현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의 엄중한 경고장이다. kj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