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아침 댓바람부터 혈압이 올랐다. 재벌 총수의 구속영장 기각을 어떻게 볼 거냐는 쟁점을 놓고 대담을 나누는 뉴스를 본 게 화근이었다. 저 혼자 수선대던 티브이(TV) 화면에 눈길을 돌렸을 찰나였다. 가끔 혀를 차며 채널을 돌리곤 하던 그 뉴스전문채널이었다. 거기에 등장하는 이들은 무슨 말을 하자는 건지 짐작하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내곤 불쑥 화면 밖으로 사라지곤 했다. 아무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가 자못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기억나는 대로 옮기자면 그는 제4차 산 업혁명을 앞두고 세계의 선진 기업들이 백척간두에서 앞날을 모색하는 마당에 한국의 대기업 총수를 구속하겠다는 건 장수에게서 검을 뺏고 갑옷을 벗겨 전장에 내보겠다는 것과 같은 처사라고 목청을 돋웠다. 한때 어느 개그프로그램에서 유행시켰던 말이 절로 떠올랐다. “이게 말이야 방귀야?” 그는 마음대로 말의 장르를 바꾼다. 그는 그가 옳은 짓을 했는가를 따지는 자리에서 무엇이 경제 발전에 이로운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자리로 갑자기 조바꿈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오늘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하도록 이끄는 보이지 않는 틀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틀은 언제나 있었다. 다만 새 틀이 이전 틀과 다른 게 있다면 보다 후안무치하다는 것이다. 전 같으면 현실에 깃든 부정과 불의를 감추는 데 애썼을 것이 지금엔 더 이상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제는 하나도 감출 게 없다는 투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그렇다. 나는 놀라운 기술의 발전이,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새로운 생명과학의 발전이, 쓰라린 대가를 지불하도록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유감스럽고 재미없는 일이지만, 숱한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고 삶은 불안정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게 세상의 이치다. 나는 이런 것이 폭력이라 생각한다. 누구를 욕보이는 적나라한 인격적 폭력을 찾아내 그것이 폭력의 전부인 것처럼 탓하는 세상이 심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작 위력을 발휘하는 구조적 폭력은, 중력이 그렇듯이, 마치 공기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자본주의라는 인공적인 규칙보다 오늘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기후변화를 경고하는 다급한 비명은 어쩐지 쇼처럼 보이지만, 제4차 산업혁명이 도래했다는 예언은 세계의 철칙이자 운명처럼 들린다. 아마 이런 게 구조의 폭력일 것이다. 어떤 압력도 거북함도 느껴지지 않는 운명처럼 기정사실이 되어, 그 폭력은 가볍게 모두의 삶을 망가뜨린다. 아침이 되면 해가 뜨듯이 내일도 이윤은 늘어나고 늘어나야 한다는 믿음은 부조리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늘날 더 이상 부조리한 것도 미신도 이데올로기도 아닌 듯하다. 불의를 따지는 것보다 시장경제의 규칙을 받드는 게 급선무라는 전문가의 진단을 듣고 불에 덴 듯 놀라는 내가, 아마 천치일 것이다. 다보스라는 스위스 어느 마을에 모여 시장경제의 두목들이 떠벌린 제4차 산업혁명이란 말이 중세 시대 교황의 칙령인 양, 오늘 우리가 기필코 명심해야 할 삶의 계명이 되는 세상이 지금의 세상이다. 그런 현실을 놓고 그런 이야기는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진짜 큰일이다. 말이, 언어가, 이야기가 세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구실만을 한다면, 아무 말도 소용없다면, 이야기가 숨을 죽인다면, 그 세상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다른 말이 등장해 어제의 무겁던 세상이 가볍게 느껴지고 가볍게만 느껴지던 세상이 육중하게 느껴져야 멀쩡한 세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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