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국가를 만들 때 우선 필요한 요소는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할 주권자인 시민의 존재다. 그다음은 이들의 의사를 모아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 즉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시민들이 합의한 헌법에 따라 국가기구를 설치하고 운영하는 것이다. 이것이 규범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국가 구성의 순서라면 유럽연합(EU)은 이른바 국가주의적 지름길(statist shortcut)이라고 불리는 정반대의 절차를 밟아 만들어졌다. 즉 가장 먼저 엘리트들이 하향식 계획을 통해 유럽연합의 기구를 만들었고, 2000년대 들어서야 그 작동 원칙을 총괄하는 헌법 제정을 시도했으며,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결정을 정당화시켜줄 원천인 유럽시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지금도 계속 노력 중이다. 물론 위로부터의 국가주의적 계획 덕분에 유럽연합은 짧은 시간에 놀라운 발전을 보이면서 20세기 역사를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유럽의 정체성을 공유하며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유럽시민의 부재는 유럽연합을 위기에 빠뜨리는 근본적 원인이 되고 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유럽 통합이 문화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그러나 애초부터 문화에 초점을 맞춰 아래로부터 유럽연합을 구성하는 길을 택했다면 유럽연합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험난한 시기를 헤쳐 나오지 못한 채 이미 좌초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역사적 변화는 위로부터의 계획과 아래로부터의 참여가 어느 수준에서 적절하게 만나야 가능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개헌 논의에 대한 우려는 다양한 개혁 의제를 헌법을 매개로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국가주의적 지름길의 강한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최근 국정농단 게이트에서 왜 그토록 유치한 집단에 의해 정상적인 국가운영이 왜곡되고 정책 집행의 보루인 관료들이 뚫렸을까? 이런 현상이 추상적인 개헌을 통해 사라질 수 있을까? 시민 각자가 자신이 맡은 위치에서 기대되는 공정한 판단과 책임의식을 저버린 채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에 휘둘린 사태는 개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즉 법과 원칙을 비웃는 부당한 권력 비판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통해 실질적 민주주의를 심화하는 길은 개헌을 한다고 해서 보장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물론 개헌은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원칙을 집대성하는 의미가 있고 그 과정은 내용 차원에서 권력구조와 시민기본권에 대한 논의, 주체 차원에서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참여가 동시에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 사회가 개헌을 위한 역사적 전환점을 맞은 것은 분명하고 개헌에 대한 논의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탄핵과 대선 국면에서 시민사회가 아닌 정치권에 의해 주도되는, 기본권이 아닌 권력구조에 대한 논의가 압도적인 현실은 우리의 우려를 증폭시킨다. 다양한 문화와 가치가 공존하는 다문화시대의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 지속되는 지루한 일상이 될 확률이 높다. 우리는 이제 한 번의 선거, 한 차례의 개헌, 한 명의 위대한 정치인에 의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그렇지 않은 상황에 익숙해져야 한다. 우리 안의 민주화는 국가주의적 지름길이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 생각의 힘을 믿고 그 힘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존엄함을 지지하는 독립적 개인이 될 때 가능하다. 광장의 촛불집회에 모인 시민들이 보여준 희망도 바로 아래로부터,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이러한 변화를 다짐하며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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