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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보수의 능참봉 / 김남일

등록 2017-01-10 18:12수정 2017-01-11 10:04

김남일
정치팀 기자

“신은 늙어 능참봉의 직을 감당키 어렵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황제’를 보필하던 ‘우발산’은 황제가 죽자 능참봉을 맡는다. 사이비 종교 취재차 대전 계룡산을 찾은 기자는 무덤에서 흐느끼는 우발산을 우연히 만나 황제의 기행을 전해듣고 글로 남긴다. 이문열의 소설 <황제를 위하여>다.

이문열은 <조선일보>에 쓴 글에서 “죽기 좋은 계절”이라며 보수를 향해 ‘죽기 전에 죽으라’고 했다. “죽어라, 죽기 전에. 그래서 진정한 보수의 가치와 이상을 담보할 새로운 정신으로 태어나 힘들여 자라가기를.” 혼자 살아남아 보수의 능참봉을 자처하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 숙종 이후 벼슬길 막혔다는 영남 남인 재령 이씨 후손인 그가 ‘나이 칠십에 능참봉’ 소리를 들을까 싶기는 하다.

참봉은 조선 18단계 품관 중 가장 낮은 종9품직이다. 말직 중의 말직. 그래도 선대왕의 능을 모시는 능참봉은 나름 첫 벼슬길에 오른 이들에게는 요직, 청직으로 대접받았다. 늦은 나이에 능참봉직이라도 얻으면 정자각에 비가 새는지, 담이 무너졌는지, 제기를 도둑맞지 않았는지 살피느라 무릎 아프고 실속 없이 바쁘다.

요즘은 사라졌지만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능참봉이란 말이 종종 쓰였다. 당내 권력지형이 흔들릴 때면 중진 정치인이 연치에 어울리지 않는 당직을 뒤늦게 맡아야 할 때가 있다. 본인은 자조적으로, 주변은 덕담 삼아 “나이 들어 능참봉 격”이라 말하곤 했다.

“80세에 저세상에서 나를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아직은 할 일 많아서 또 출마한다고 전해라.”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해 4·13 총선을 앞두고 어디를 가든 ‘백세인생’을 불렀다. 그렇게 8선 의원이 됐으니 이문열의 ‘먼저 죽으라’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서 의원은 친박근혜계 청산을 요구한 인명진 당 비상대책위원장을 탈당강요죄 등으로 검찰에 고소했다. 당을 두 쪽 내고 세 쪽으로 가르더라도 정치적 죽음만은 택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수의 능참봉을 떠맡을까. ‘여든 나이에 능참봉’이라도 하겠다며 2020년 총선 때도 백세인생을 부를지언정 지금은 아니다.

여의도 사방에서 능역에 나선 이들의 땅 파는 소리가 요란하다. 정치적 붕어(崩御),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을 의심하는 정치인은 없다. 혼군을 모시다 덩달아 정신줄 놓은 극소수 친박들마저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데, 정작 곡하며 능참봉 맡겠다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권력을 쥐고 흔들던 이들에게 풀이나 뽑아야 하는 말직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 지척에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 이복동생 중종의 능인 선릉·정릉이 있다. 임진왜란 때 도굴당해 시신조차 없다지만 관리 잘된 봉분이 장쾌하다. “연산군이 생모가 폐비 윤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가….” 사가로 쫓겨나 사약을 받기까지 정사와 야사를 섞은 문화해설가의 설명이 귀를 잡는다. 경연은 마다하고 죽은 생모를 위해 무당 불러 굿판을 벌이던 연산군도 궁에서 쫓겨난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전 살던 삼성동 자택도 선정릉이 코앞이다. 무당 ‘원자경’의 딸 최순실의 집, 미르재단과 케이(K)스포츠재단 사무실도 근처다. 어째 박 대통령은 이 집을 팔고 자신의 정치적 고향으로 내려가야 할 듯싶다. 세계문화유산 옆에 추문 무성한 정치적 무덤을 굳이 둘 이유가 없는 탓이요, 그나마 아버지의 능참봉을 자처하는 이들은 그 동네에 여전히 많은 탓이다.

namfic@hani.co.kr

[관련 영상] 한겨레TV | 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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