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그가 남긴 귀한 작품과 성취로 오래 기억될 사람들이 매년 얼마씩 세상을 떠난다. 그중 어떤 이들은 내가 그를 잘 알지 못하는데도 그의 위대한 성취가 아니라 그에 대해 가졌던 각별한 친밀감 때문에 모종의 상실감을 안겨준다. 2016년 7월4일에 떠난 이란 영화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가 그러했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의 경계를 어떤 과시적 형식 없이도 가볍게 넘나든 그의 영화적 성취를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으리라. 20년 전 한 이국 도시의 변두리 극장에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2)를 보았다. 삶의 갈피를 완전히 잃어버린 채 홀로 떠돌던 내게 그 영화는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 내 잘못을 책망하지 않았고 헛된 꿈을 전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아직은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보는 동안 계속 눈앞이 흐려졌지만, 극장을 나오자 세상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았다. 낯선 도시에서 그 영화는 유일한 친구였다. 생전에 부산을 여러 번 찾은 그를 2012년 봄, 사석에서 만났을 때, 그에게 그 이야기를 하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는 정말로 손을 내밀며, 자신의 영화가 소수에게라도 친구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해주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영화는 친구 이상이었다. 그의 영화를 보며 친밀의 카메라 혹은 친밀의 형식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뒤로 영화를 조금은 다르게 보게 된 것 같다. 이미 떠난 그에게 늦게나마 미처 다 말하지 못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며칠 전인 1월2일에는 존 버거가 떠났다. 그의 비평을 읽으며 많이 배웠고 글을 쓰면서 여러 차례 인용도 했지만, 내게 가장 깊이 남은 것은 (2009)이다. ‘편지로 씌어진 소설’이란 부제가 붙은 이 기묘한 소설은 테러리스트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받고 수감된 사비에르의 메모와 연인 아이다가 보낸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소설은 길지 않지만 여러 번에 나눠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대목에 이르면 머리가 멍해져 책장을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당신에게 이중종신형을 선고하는 그날부터, 나는 그들의 시간을 믿지 않게 되었어요.” “내가 보낸 손 그림들을 창문 아래 붙여놓았다고 했죠. 그렇게 하면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림들이 제멋대로 흔들린다고요. 그 손들은 당신을 만지고 싶은 거예요.” “낮에 있었던 말다툼이나 최근에 죽은 사람, 누가 새로 아기를 가졌는지, 오늘 밤에는 어디서 물을 길어 와야 할지… 수천개의 가정들, 그 가정들 하나하나마다 예측하지 못한 비밀이 숨어 있어요. 그들은 그런 비밀들과 떼어놓기 위해 당신을 감옥에 넣었지요.” 이 소설이 21세기에 쓰였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 경건함과 친밀함과 에로스가 서로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동반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져온 세계가 더없이 부드러운 언어로 거기 펼쳐져 있었다. 존 버거는 혹시 마지막 20세기인 어쩌면 마지막 19세기인일까. 그렇다면 그의 세계는 이젠 향수의 대상일 뿐일까. 아니면 혹시 여전히 하나의 약속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그가 이 소설의 한국어판 서문에 쓴 ‘뒷문’의 문학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부엌으로 바로 들어가는 문, 요리사와 접시닦이, 장사꾼들이 이용하는 문”, “항상 소란스럽고 많은 것들이 드나드는 문”, “늘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문” 그리고 두 주인공과 존 버거 자신이 이용한다는 문. 그 친밀한 문으로 안내해준 그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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