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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이인화의 길, 조윤선의 길 / 박민희

등록 2017-01-04 18:33수정 2017-01-04 20:54

박민희
문화스포츠 에디터

“그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태어나 가장 고통스러운 세월을 이겨내고 가난과 절망에 빠진 한 민족을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번영으로 이끌었다. 죄와 배신과 불의와 타락에 몸을 적시며 결단코 이상을 향해 매진했던 그 고독과 우수의 마키아벨리즘을 이해하면서 나는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에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았던 힘과 용기를 발견했던 것이다.”

이인화라는 필명으로 1990년대 한국 문학의 스타였던 류철균 이화여대 교수가 소설 <인간의 길>(1997)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바친 뜨거운 찬양가다. 보수기득권 세력이 박정희교라는 사교 전파에 나서던 시점에 그는 발빠르게 박정희 우상화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권이 나온 것보다 1년 앞선 행보였다. 그가 박정희 딸의 정권에서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 청년희망재단 초대 이사로 승승장구하다가, 결국 비선실세의 딸 정유라에게 가짜 학점을 주고 조교들을 위협해 가짜 답안지까지 위조한 혐의로 구속되며, ‘박근혜-최순실 정권 부역자 열전’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 길의 예고된 결말이다.

대학원 시절부터 소설가와 비평가로 유명했던 그는 29살에 이화여대 교수가 됐다. 그런 그가 권력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제대로 된 작품을 쓰지 못한 것은 권력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스스로 정치적 작가이고자 했고, 강력한 왕권, 영웅적 지도자에 열광했던 그가 찾아낸 것은 박근혜의 공허하고 무능한 절대권력이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파문의 중심에 선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권력의 정점을 향해 질주해온 예술 애호가였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을 다 가진 ‘다이아몬드 수저’다.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사법시험 합격,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한국씨티은행 법무본부장, 국회의원, 청와대 정무수석, 여성가족부 장관, 문체부 장관으로 끝없이 올라갔다. 한편으론 오페라 평론을 쓰고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 같은 책을 펴낸 예술 애호가이자, 45억7996만원의 재산을 신고한 부자다. 2012년 대선 후보 캠프 대변인을 맡아 박근혜와 맺은 끈끈한 인연으로 승승장구했고, 박근혜 코드 맞추기에 너무 공을 들여 ‘박의 여자’ ‘무수리’라는 뒷말도 나왔다.

그가 청와대 정무수석이던 2014~2015년 김기춘 비서실장의 지시를 받아 정무수석실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집행하는 데 주도적 구실을 했다는 문체부 전·현직 관계자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지만, 그는 국회에 나와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적도, 지시한 적도, 본 적도 없다”는 해명을 되풀이하다 국회 위증죄로 고발당했다. 그가 문체부 장관에 취임한 뒤 블랙리스트 관련 자료들을 파기하는 증거인멸 지시가 내려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그는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 서문에서 소동파의 글을 인용해 “예술이란 무엇일까? 그건 느끼고 취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주인이 될 수 있는 바람과 달과 같은 존재일 게다”라고 했지만, 스스로는 바람과 달과 같은 예술과 예술가들을 돈과 권력으로 통제하고 길들이려 했던 박근혜-김기춘 연출 ‘빅브러더’ 연극의 주역이 됐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들의 화려한 재능과 학벌·지위와 돈·권력을 선망하며 강자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길들여졌다. 촛불과 광장에서 서로의 힘든 사연에 귀기울이고 공감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가면을 벗겼다. 그들은 이제 온갖 불의와 타협하며 돈과 권력을 다 쥐어온 기득권 세력을 상징하는 반면교사로서 무대에 서 있다. 우리가 왜 우리 안의 박정희주의, 영웅주의를 극복하고, 더 공정한 세상, 약자들이 덜 힘든 세상, 권력이 함부로 개인을 감시·통제하지 않는 나라를 함께 만들어나가야 하는지 증언하는 증인이기도 하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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