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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열폭사회

등록 2017-01-04 18:31수정 2017-01-04 21:09

강탈과 착취로 쌓은 기득권 속에서 그들이 끼리끼리 사돈을 맺어가는 동안, “개돼지” 대중은 패자부활도 없는 살벌한 경쟁에 길들여졌고 낙오의 공포에 쫓기며 ‘개천용’을 향해 달려왔다. 등용문은 원래 바늘구멍이었고 이제는 그조차 완전히 닫혔다. 용이 멸종한 자리는 전국 1등부터 꼴찌까지 촘촘히 줄 세운 대학 서열표로 ‘토론’하며 노는 학벌 훌리건들로 채워졌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김민하는 <냉소사회>에서 인터넷 담론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냉소주의를 풀어낸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체제가 개인에게 ‘열폭’(열등감 폭발)을 강요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 냉소주의와 소비(자)주의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냉소주의는 사회 진보를 저해하기에 슬기롭게 극복되어야 한다. 열등감은 심리치료 등의 개인 단위에서 종종 호출되는 단어임에도 집단 단위의 사회 분석에선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김민하는 이 개념을 과감히 도입하고 있다. 책의 줄기는 냉소주의 분석이기 때문에 열등감을 길게 논의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약 냉소주의의 원인이 열등감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중요한 사회 문제로 분석될 필요가 있다.

막연히 “열등감이 한국 사회의 문제다”라고 말하는 걸론 부족하다. 우리는 스스로가 열등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고 직관적으로 느끼지만 다른 사회에 비해 정말 그런지, 어느 정도 그러한지는 따져 봐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열등감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감정이다. 그것은 절망감이나 무력감 같은 감정과 잘 구별되지 않거니와, 국가 간 차이를 드러내고 비교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로 사용되는 경우도 드물다. 당장 ‘세계 열등감 조사’ 같은 걸 실시하기도 어려우므로 대체재를 찾아야 한다. 다행히 우린 이미 그걸 가지고 있다. 열등감은 결국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한 불만족 혹은 불행감’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행복지수’ ‘삶의 만족도’라는 개념은 어떤 사회 구성원의 열등감을 시사하는 지표라 봐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지표로 본 대한민국은 글자 그대로 열등감 폭발하는 사회다. 경제규모 세계 10위권에 교육수준, 기대수명 같은 지표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함에도 한국인 개개인이 느끼는 불행감 내지 불만족은 놀라우리만치 크다. ‘2016 세계 행복 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행복지수에서 58위였고, 2015년 갤럽이 실시한 ‘일상적 행복감’ 조사에서는 143개국 중 118위였다. 2016년 경제협력개발기구 35개국 중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5.8점으로 28위, 최하위권이다. 한국 사회의 진짜 문제는 바로 이 지점, 국가·대기업의 풍요와 국민 개인이 느끼는 불행 사이의 괴리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 현상의 이유로 집단주의를 꼽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사회에선 주변의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남들과 비교하며 자기 처지를 비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견 설득력 있지만, 그 관점은 왜 집단주의가 더 강한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유독 한국이 불행하다 느끼는지, 그리고 서구 국가들 중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영미권에서 왜 삶의 만족도가 가장 높지 않은지를 설명할 수 없다. ‘열폭사회’, 개인이 불행한 사회의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사회적 가치의 획일성’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 모델, 선호되는 인생 목표가 지나치게 동질적이라는 것이다. 이걸 적나라한 몽타주로 표현하면 ‘신체 나이 20대인 서울대 출신 강남 건물주’다. 현대 한국인의 욕망은 소용돌이처럼 이 한 점으로 수렴한다. 다른 성공 모델은 전부 그 파생형일 따름이다. 비교 기준이 이렇다 보니 극소수 승자와 절대다수 패자가 양산될 수밖에 없다.

정당성도 책임감도 없는 부패한 엘리트 집단이 100여년에 걸쳐 이 나라를 지배해왔으니 어찌 보면 필연적 귀결이다. 강탈과 착취로 쌓은 기득권 속에서 그들이 끼리끼리 사돈을 맺어가는 동안, “개돼지” 대중은 패자부활도 없는 살벌한 경쟁에 길들여졌고 낙오의 공포에 쫓기며 ‘개천용’을 향해 달려왔다. 등용문은 원래 바늘구멍이었고 이제는 그조차 완전히 닫혔다. 용이 멸종한 자리는 전국 1등부터 꼴찌까지 촘촘히 줄 세운 대학 서열표로 ‘토론’하며 노는 학벌 훌리건들로 채워졌다. 돈이 실력으로 대물림되는 사회임을 알지만, 아무리 ‘노오력’해도 출발선이 너무 다름을 알지만, 그래도 이들은 허울만 남은 능력주의 신화를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수능점수에 더욱더 집착한다. 나보다 서열 낮은 대학 출신자 앞에선 고개를 치켜들고, 나보다 서열 높은 대학 출신자 앞에선 기가 죽는다. 바로 이들이, 한곳만 보며 달려온 국가가 만든 ‘마지막 인간’(the last man)이자 ‘열폭사회’의 보편적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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