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습관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양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선의 정치 형태라 일컬어지는 민주주의는 익명화된 인구들이 지닌 의견을 수치화하여 산출된 다수의 뜻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계량화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에는 장단점이 있다. 이 논리는 다수가 수렴될수록 진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인류 보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평소에는 정치로부터 소외된 보통 사람들이 작은 의견을 보탬으로써 큰 물결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패배한 표의 유실을 묵과한다. 아울러 양적인 범주에서의 많고 적음의 논리는 질적인 차이들을 분별하는 데에 둔감하기 쉽다. 가령 ‘가’ 정당을 선택한 표가 정말 그 당을 지지한 건지 다른 당이 더욱 싫어서 부득이하게 취한 차악은 아닐지, 또는 정당의 어떤 면모를 선호하거나 반대하는지에 대한 정교한 해석은 무마되기 마련이다.
■ 촛불집회에서 수의 의미
전국에서 232만여명이 모였던 촛불광장으로 들어가보자. 대부분의 언론은 광장에 참여한 시민의 수를 강조하며 촛불집회의 위력을 보도했다. 거대한 수의 군중은 즉각적으로 흥분, 감동, 숭고함을 불러일으킨다. 제도정치에서 배제되어온 다수 시민이 자발적으로 구축한 대규모의 집합성이 지금의 민주주의를 반성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발명해야 할 절대성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 분노와 열정으로 가동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그것이 지닌 심대한 의미는 침착하게 사유되어야 한다. 자기 반성력 없는 운동은 생명력이 길 수 없다. 따라서 현재 탄핵정국을 이끌어가는 촛불집회 현상에 대한 성찰 역시 운동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지금처럼 국가적인 사안으로 발전할 수 있기까지에는 지난여름부터 꾸준히 크고 작은 정보들을 치밀하게 추적하고 고발한 <한겨레>의 기여가 크다. 그리고 지금의 탄핵정국에서도 <한겨레>는 여타 언론들보다 더욱 활발하고 개방된 태도로 촛불광장의 시민들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접하고 전하고 있다. 또한 탄핵정국을 전망하는 정치계와 학계 및 시민사회의 입장을 다각적으로 청취하여 전달함으로써 장기적인 대응 방책에 대한 사회적 사유를 촉구한다.
그럼에도 촛불광장의 안과 밖을 연결하고 촛불집회의 현재를 미래로 확장해 나가는 거시적인 접근은 아직까지 미약한 듯하다. 주요하게 관찰되는 문제점을 이렇게 추려볼 수 있겠다. 우선 거대한 수치로 표현되는 시민의 존재성이다. 흔히 유력자의 발언은 그 하나가 개별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반면 일반 대중의 의견은 익명의 양으로 뭉쳐진 목소리의 크기로 평가된다. 오로지 촛불광장에서 시민의 수가 얼마나 불어나는지가 관심의 대상이 될 경우에 정치체제에 내재하는, 발화의 실질적인 영향력에 관한 차등화된 위계질서가 강화될 수 있다. 따라서 시민의 양에 흥분하는 대신 그 다수성을 구성하는 섬세한 결들을 정치적 질로 고양하는 방향이 제시되어야 한다.
또한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정치적 타당성이 강조되다 보니 때로는 양분화된 대립논리가 돌출한다. 대표적으로 박사모와 촛불시민, 또는 정치인과 대중 사이의 대립 프레임을 들 수 있다. 나는 광장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복잡다단한 상호관계가 형성되며 다수의 의견이 활발하게 개진되고 서로 만나면서 자율적으로 조정되기에 광장에의 참여가 건강하고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언론에서 이들을 단순화된 이분논리로 틀짓는 순간 갈등이 양극화되어 나타나고 더욱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논쟁과 조정의 가능성이 희석될 수 있다.
이어 시민의 직접행동과 공인된 담론 사이의 분리 현상을 들 수 있다. 광장 현장에 대한 취재 내용은 거의 전적으로 시민으로 채워졌고 이때에는 시민이 정치인들을 배척하는 탈권위주의가 강조된다. 반면 탄핵정국에 대한 전문화된 논의는 정치인, 학자, 시민단체 간부 등을 포함한 기성의 엘리트 집단으로 구성된다. 이는 ‘전문가와 비전문가’, ‘엘리트와 보통사람’ 식의 차별화된 상징질서를 따르는 전형적인 관행이다. 말하자면 거리에는 다수 대중이, 그러나 정책 결정 회의장에는 소수 엘리트가 당연한 듯 배치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광장이 발휘하는 정치력은 거대하고 정당하다. 그러나 촛불광장 담론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하나 된 국민’이라는 신념은 자칫 위험하다. 역설적이게도 ‘국민’은 유신체제가 만들어낸, 획일화된 통치 대상을 가리키는 어휘다. 따라서 이른바 국민 통합성에 대한 과신에서 벗어나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의 자율성과 특이성의 의미가 복원될 때 한국 사회에 빼곡하게 체질화된 유신체제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체가 가능하다.
■ 촛불 이후의 정치적 지성을 위해
분명한 사실은 광장에 선 사람들이 하나라는 믿음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당장의 급선무인 대통령 탄핵과 퇴진을 단일 목표로 삼아 하나의 연대로 뭉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광장에서도 발언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노동, 재벌, 교육, 언론, 나아가 생명과 죽음의 체제 자체-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장차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협력하는 질서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라는 신념 안에 실재하는 차이와 변화들에 투명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탄핵정국이라는 예외 상황 이후에도 촛불 운동정신이 꺼지지 않고 정치의 근본으로 존재하면서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회 현실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실질적인 힘으로 응용될 수 있다.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광장에 몸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정치는 이미 전개된다고 말한다. 또한 스테판 에셀은 분노할 수 있는 힘이 참여의 의지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단지 최다 득표자를 선출하는 작금의 보통선거 방식을 넘어서 시민과 통치자 사이의 관계를 새로이 설정하는 참여민주주의와 정치적 창의성을 요청한다.
이제 우리는 분노할 줄 알고 참여하고자 한 몸들이 광장에 모인 촛불 이후를 내다보아야 한다. 어떠한 정치적 가치를 추구해야 할지, 어떻게 들끓는 분노를 모아서 지속가능한 참여민주주의로 만들고 행할지, 신생의 참여민주주의 정신을 어떤 참신한 방식으로 정치 제도화·공고화할지를 발랄하게 탐구하고 진중하게 실천해야 할 순서다. 이 귀중한 행동들을 정치적 지성이라 부를 수 있다면, 정치적 지성을 구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은 당연히 언론에도 부여된다.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