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 수습과 대업(大業) 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허황한 사실을 퍼뜨려 정부 위신을 손상하고 민심을 분산시킴은 물론… 심지어 정부까지 부인했다. … 국가 총책임자로서 정부 행정과 재무를 방해하고 헌법에 따라 선거를 거쳐 취임한 대통령이 자기 지위에 불리하다고… 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했다. 이렇게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 자리에 둬서는 대업을 진행할 수 없다.’ 마치 박근혜 대통령 탄핵 결정문 같은 이 글(심판서)의 주인공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당시 그는 3·1운동 직후 출범한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본인도 대통령으로 행세했으나 6년 만에 탄핵당한다. 사유는 여럿이다. 우선 그는 임정을 자신의 기반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기고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으며 상하이에는 6개월만 머물렀다. 그는 초기엔 전보와 통신원에 기댄 ‘현장부재 대통령’이었으며, 1920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간 뒤엔 사실상 직무에서 손을 떼 임정은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됐다. 그의 정치 이념과 노선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특히 그가 1919년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청원서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사실은 두고두고 분란의 씨앗이 됐다. 1925년 3월18일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킨 의정원(입법부)은 5명의 심판위원을 선정해 그의 위법 사실을 조사하도록 한다. 심판위원회 심리를 거치면서 탄핵은 면직으로 바뀌었고 면직안은 3월23일 의정원에서 가결된다.
이승만의 주된 탄핵 사유인 ‘자리 이탈’은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직무유기’를 연상시킨다. 임정에서 밀려난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이 돼 독재를 계속하다가 35년 뒤인 1960년 또 쫓겨난다. 이 또한 박정희·박근혜 부녀 대통령이 38년의 시차를 두고 타의에 의해 대통령직을 마감하는 것과 닮았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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