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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병익 칼럼] ‘촛불 시위’의 정치시학

등록 2016-12-22 18:22수정 2019-10-17 16:34

꼭 한 세대 후에 이루어진 12·9의 결단은 두 번의 앞선 혁명에도 여전히 미진한 상태로 처져 있던 민주주의의 생활화와 내면화를 위한 진전이 되리라. 그것은 민주주의가 정치권의 상투어가 아니고 권력자가 남용할 위선이 아니라 우리 사회적 개인적 삶의 실질이 되기를 바라는 평범한 시민들의 염원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촛불은 바슐라르 같은 위대한 몽상의 철학자만이 아니라 나 같은 범용한 세속인에게도 아담한 빛으로 어둠을 밝히며 명상에 젖게 하고 손바닥으로도 가릴 조그마한 불꽃의 희미한 따뜻함은 세상의 한기를 덥힐 소중한 소망을 피워준다. 그 촛불들이 몇 개에서 몇천 개로, 몇백만 개로 모여들어 도심의 소요를 지우고 초겨울의 추위를 막아낼 뜨거운 불꽃으로 번져날 때 그 수줍은 미덕은 마침내 광장의 정치학으로 비약하고 그 조용한 아름다움은 세련된 민주주의의 미학이 되었다. 수천만의 우리는 작은 촛불이 광장의 정치시학으로 확산되는 장면을 현장에서, 화면으로, 기사로 겪고 보고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12·9 결단’을 일구었다. 여든에 이르는 내 생애에 4·19와 6·10에 이은 세 번째 시민혁명, 그래서 우리의 일상화한 민주주의, 아렌트 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민주주의의 일상성’으로의 발전을 확인한 것이다.

나는 거리에서 외치는 시민민주주의자들의 첫 고함을 들을 때 라인홀드 니부어의 제목을 따 ‘비민주적인 사회와 민주적인 시민’의 불균형스런 우리 정치사회에 한탄했다. 왜 우리는 여전히 권력 가진 자들의 횡포에 속아넘어가고 돈 있는 자들의 억압을 견뎌야 하며 목청 큰 가짜들의 소행에 길들여져야 하는가. 그러면서도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은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의 성장과 정의에 대한 끈질긴 믿음을 경험한 때문이다. 1960, 1987, 그리고 2016 등 거의 30년 한 세대마다 일어나는 뜨거운 항의는 불우한 우리 근대사의 굴곡과 ‘압축성장’으로 왜곡된 우리 현실을 수정해왔다. 그것은 대가 없는 역사란 존재하지 않고 고통 없는 성장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경험적인 정리를 가르쳤고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는 시민들의 피어린 노고가 요구된다는 진실을 깨우쳐주었다. 우리 민주주의 역사는 세계의 현대사에 멋진 실례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4·19는 반 세대 전의 식민지 상태로부터의 해방에 마땅히 따라야 할 앙시앵 레짐의 구조를 타파하면서 10년 전의 한국전쟁이 안겨준 수난과 불행을 극복해야 할 계제에 일어났다. 한 소년의 어이없는 주검으로 시작된 항의가 서울의 수십만 젊은이들의 시위로 확장된, 그리고 혁명이고 의거이고 기념으로 그 평가가 오르내린 4·19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말로 교육받고 우리글로 사유한 해방 후의 첫 한글세대였고 기성사회에 진입하여 사회적 근대화와 산업경제를 주도한 새 패러다임 사회의 시민이었다. 이 민주혁명에 반동으로 제기된 이듬해 5·16의 일본어 세대 주체는 민주주의의 실천에는 아직 미숙한 우리 국가와 사회를 관료적 군대식 체제로 운영했지만 그 군부세력은 산업 발전으로 민주주의를 감당할 중산층과 경제적 풍요를 일구어준 큰 성과를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구세대의 유습을 벗지 못해 독점 장기 권력으로 국민들을 장악했지만, 유신과 독재에 대한 내부 저항으로 전임 통수권자 못지않은 참담한 운명을 당해야 했다.

6·10은 경제발전과 문화성장, 이에 따른 시민 의식의 진화에도 그를 따르지 못한 군사권력 세대의 둔감한 시대적 의식과 절차에 대한 항의로 전개되었다. 이번에도 한 대학생의 안타까운 죽음이 빌미가 되었지만, 여기에는 민주주의적 삶의 질과 형식에 길들여진 숱한 중산층이 지닌 이념과 실제 간의 고통스런 괴리가 합류했다. 그 주체는 현대사회적 체질로 발전한 시민들과 산업사회 노동자들이었으며 자유롭게 사유의 길을 넓힌 개방 시대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그동안의 금기였던 진보적, 탈자본주의적 인식으로 사상을 넓히며 평등의 실질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열망했다. 이 인식과 추구의 성과로써 우리의 정신과 현실의 선택은 전방위적으로 열리고 자유와 박애가 함께할 새로운 체제 이념이 실천적으로 확산되었다. 6·10은 자칫 후진국의 타성이 될 군인들의 권력욕을 제어하고 노동자의 권리와 여성-장애인 등 소수자 인권의 존중과 없는 자들을 위한 복지권과 지방자치권을 키웠다.

꼭 한 세대 후에 이루어진 12·9의 결단은 두 번의 앞선 혁명에도 여전히 미진한 상태로 처져 있던 민주주의의 생활화와 내면화를 위한 진전이 되리라. 그것은 민주주의가 정치권의 상투어가 아니고 권력자가 남용할 위선이 아니라 우리 사회적 개인적 삶의 실질이 되기를 바라는 평범한 시민들의 염원이다. 정치는 정도를 걸어야 하고 권력은 바르게 사용되어야 하며 지도자는 시민들의 의지를 옳게 헤아려야 한다는 큰 요구로부터, 부는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며 가진 자의 갑질은 제거되고 5포 세대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건질 수 있어야 하며 ‘헬조선’에서 지옥의 암울한 이미지를 벗겨내야 할 실행적 처방을 제시한다. 운영에서 ‘고장(out of order)’나서 통치력을 ‘상실(out of system)’하여 마침내 ‘부재(out of being)’ 상태에 빠진 국가원수직의 존재와 책임을 어둔 밀실에서 밝은 광장 앞으로 드러내기를 요구한 것은 그 일상화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가장 새삼스런 첫발이다.

나는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필수적일 이 계기가 ‘촛불’이란 작고 다스하며 꺼질 듯 힘없는 빛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한없는 감동과 자부를 갖는다. 그 약한 빛의 펄럭거림은 밀실에서 광장으로 뛰쳐나와 차분한 속삭임에서 거대한 함성으로, 개인적인 꿈에서 참여와 연대의 열망으로 폭발했다. 한 낱의 그 소망의 불빛은 수백만, 수천만 민주 의식의 열기로 증폭했고 촛대 위의 가냘픈 불꽃은 아름다운 촉화(燭畵)를 그리며 꺼지지 않는 형광등, 타오르는 횃불로 번졌다. 수백만 불꽃들이 외친 공동의 열망은 새로운 시대와 체제의 희망으로 부풀어오른 희망과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그 요구와 열기의 함성 속에서, 아아 그럼에도, 한 명의 연행자도, 부상자도 없이 평화적으로, 환희의 축제를 이루었다. 어느 시대의 반항이 이처럼 평화로웠던가, 어느 곳의 시위가 이처럼 즐거웠던가. 어린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역사의 현장을 기억 속에 심었고 소년들은 시위 끝의 어지러운 쓰레기들을 치웠으며 꽃스티커를 붙였다. 그들은 어른이 되어 민주주의 권력체제가 망가지면 어떤 모습이 될지 교육받을 것이고 지금의 내 나이에 이르면 “이것이 우리 시대였다”란 뜨겁고 엄숙한 역사화(歷史畵)로 회상할 것이다.

나는 이 ‘12·9 결단’이 곧바로 우리 정치적, 사회적 삶에 고스란히 성취되고 민주주의의 생활화가 편하게 이루어지리라고 결코 낙관하지 않는다. 이미 숱한 고통과 희생이 요구되었듯이 앞으로의 정치 현장과 시민 광장에 숱한 문제들이 생기고 잇단 결렬이 일어나며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돌멩이와 총으로 맞선 4·19가 봉건 농경제 사회적 배경에서 일어난 투쟁이며, 화염병과 최루탄의 6·10 항쟁이 교도적 산업사회 속의 충돌이라면, 12·9 시위는 촛불과 차벽으로 마주한 새 세기 권력 해체적 문화 다양성의 요구로 진화해왔다. 이 과정에서 일어날 숱한 구조적 세대적 갈등들은 끝내 시민사회의 가치로서 ‘민주주의의 일상화’가 발현되리라 믿는다. ‘촛불 정치’의 가장 큰 의미는 모호한 민주주의의 실재란 바로 ‘민주주의를 향한 실천적 과정’에서 이루어지며 그 민주화의 절차 수행이란 동어반복 속에서 성숙한다. 가냘픈 촛불의 강렬한 정치시가 지닌 미학이 이 아름다운 진실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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