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한 친구가 술자리에서 갑자기 2043년 대재앙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느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보았는데, 다이애나의 죽음, 9·11 사건, 트럼프 당선 등을 정확히 맞힌 한 브라질 예언가가 2043년에 세계 인구의 80%가 사라진다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세 사람은 모두 그때까지 자신들이 살아있다면 20%의 생존자에는 끼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거의 농담처럼 주고받은 말이다. 종말론이 세계에 대한 염려보다는 도착적 향락에 더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젊은 일본 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이미 5세기부터 등장한 종말론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안 결정적인 일이 찾아와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병든 사고”라고 비판했다.(<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다만, 뜬금없게도 80%라는 숫자가 여론조사에서의 대통령 탄핵 찬성률(78~81%), 그리고 국회의원들의 탄핵 찬성률(78%)을 연상시켰다. 두 숫자 사이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는데도, 믿기 힘든, 아니 믿어서는 안 될 대재앙 이후 20%의 생존자들과 탄핵에 반대한 20% 사이엔 모종의 관련성이 있을지 모른다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걱정거리와 나이는 비례한다고들 한다. 음식을 먹을 때 이전보다 많이 흘린다고 말했더니 한 지인은 그게 신체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자질구레한 걱정에서부터 해결할 수도 책임질 수도 없는 큰 걱정까지 걱정거리가 늘어나 매사에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일 것이다. 기뻐할 일 앞에서도 제대로 기뻐하지 못하고 걱정이 앞서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난 11월12일, 광화문에 처음 나갔을 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촛불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왠지 뭉클하면서도, 오늘은 하나인 그들이 바라는 세상이 모두 같지는 않을 것이며, 그중의 많은 사람들은 내일의 세상에서도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 못해 괴로워할 것이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피하기 힘들었다. 이성적으로는 종말론을 믿지 않더라도, 세상이 점점 더 나빠져 간다는 느낌, 그리고 오늘의 인류가 너무 많은 것을 누린 대가로 내일의 인류에게 참혹한 지구를 물려줄 것이라는 예감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 한 고비를 넘더라도, 더 많은 욕망을 발명하고 그 욕망이 더 많은 소비로 이어져야 지탱되는 시스템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더 큰 고비를 맞이할 것이라는 예감도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면서 소박하고 조화로운 공동체가 영위되던 어제, 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상상의 어제를 습관처럼 그리워한다. 이런 부질없는 향수가 찾아올 때 떠올리게 되는, 가까운 이들과 나누고 싶은 말이 있다. 위대한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1894~1979)의 말이다. “우리들은 마음의 평화를 위해 추억의 마법에서 탈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은 변해버린 세계의 지옥 속으로 단호하게 뛰어드는 일이다. 그것은 수평적으로 분할된 세계이고 실용적인 세계이며 열정이 사라진 세계임과 동시에 향수도 사라진 세계이다. 우리들은 마가뇨즈의 목로주점도 잊어버려야 한다.”(<나의 인생 나의 영화>) 추억과 향수를 버리고 현실의 지옥으로 뛰어들 것을 청하면서 르누아르는 다소 뜬금없는 말을 덧붙이는데 이 말이 참 좋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절대 헤어져서는 안 된다. 오랜 헤어짐 뒤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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