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가을과 겨울, 시민들은 ‘헬조선’이라 불리는 이 땅을 포기하고 떠나는 대신 그 심장부로 몰려들었다. 별을 세고 분자를 세던 과학자들은 광화문광장에 모인 촛불과 사람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세어서 시민의 뜻을 전달했다. 외계행성 천문학자들이 프록시마 b에서 살 만한 세계를 상상했듯, 한국의 과학자들은 꽉 막힌 듯했던 광장이 아직 살 만한 곳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2016년 과학계의 화제 중 하나는 켄타우루스 자리 프록시마 별 주위를 도는 행성 프록시마 b의 발견이었다. 지난 8월 하순 유럽남천문대의 과학자들이 소개한 프록시마 b가 특히 큰 관심을 끈 것은 이 행성이 지구와 크기가 비슷하고 별에서 적당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어서 그곳에 생명이 살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태양 이외의 별 주위를 도는 행성을 연구하는 외계행성 천문학자들은 지구와 비슷한 조건을 갖춘 행성을 발견하고 조사하는 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다양한 크기와 조건의 천체 중 유독 “또 하나의 지구”라고 부를 만한 행성이 과학자들을 더 들뜨게 한다. 왜 하필 지구를 닮은 행성을 찾으려 할까? 외계행성 천문학자들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인류학자 리사 메서리는 이들에게 우주라는 추상적인 공간(space)을 구체적인 장소(place)로 간주하려는 태도가 있다고 지적했다. 천문학자에게 프록시마 b는 밋밋한 심연 속의 무의미한 좌표가 아니라 인간적인 의미로 가득 찬 장소로 다가온다. 그 안에 하나의 세계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면, 이 광활한 우주에 우리만 고독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따지고 들면 다른 점투성이일 것이 분명한 프록시마 b에서 과학자들은 어떻게든 지구의 모습을 찾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거기도 살 만한 곳인가요?” 한국의 2016년은 이곳이 더는 살 만하지 않다는 외침으로 시작했다. 올해 첫날 <경향신문> 사설은 “이런 나라가 아이 낳아 키우기 좋은 곳일 수 없다. 이제 한국은 호모 사피엔스가 서식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같은 지면에서 손아람 작가도 “한 세대가 통째로 삶을 포기한 불모지에서는 누구도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발했다. 살 만한 곳이 사라지고 있다는 경고는 공기, 물, 땅을 통해서도 전해졌다. 집안을 떠다니는 독성 가습기 살균제와 거리를 가득 메운 미세먼지는 숨 쉬고 살 만한 곳을 축소했다. 녹조와 오염물질이 들어찬 4대강은 물고기와 사람이 믿고 마시며 살 만한 곳이 아니다. 9월부터 경주 지역에서 잇달아 발생한 지진은 우리 동네가 과연 발 딛고 살 만한 곳인지 의심하게 했다. 특히 원전과 함께 대대손손 살아도 괜찮은 곳인지 걱정하게 되었다. 도대체 여기는 살 만한 곳인가요? 과학과 정치가 함께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때로 과학자와 정치가는 못 살겠으면 포기하고 떠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한다. 지난 9월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원래 쓰던 낙동강 물 대신 ‘녹조 없는 1급수 댐’을 새로 지어서 식수원으로 삼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파괴된 강을 공들여 살리기보다는 그냥 포기하고 새것을 뚝딱 만들어주겠다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라는 비판이 일었다. 9월말 열린 국제 우주공학 회의에서 우주개발 회사 스페이스엑스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는 인간이 화성으로 날아가서 정착하기 위한 계획을 제시했다. 지구에 큰 재앙이 닥쳐 인류가 살지 못할 곳이 되면 우리의 선택은 태양계에서 그나마 가장 살 만한 곳인 화성으로 가는 것이라는 주장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버리고 떠나자는 말을 무조건 환영할 수는 없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이들에게 과학과 정치는 무엇을 제시할 것인가. 2016년 가을과 겨울, 시민들은 ‘헬조선’이라 불리는 이 땅을 포기하고 떠나는 대신 그 심장부로 몰려들었다. 불모지를 갈아엎고 두 발로 다져가며 어떻게든 살 만한 곳으로 바꾸어 보겠다고 나섰다. 여기에 과학자들도 힘을 보탰다. 별을 세고 분자를 세던 과학자들은 광화문광장에 모인 촛불과 사람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세어서 시민의 뜻을 전달했다. 옆 사람과 같이 걷거나 자리 펴고 앉아서 미래를 도모하기에 비좁지 않은 곳인지를 꼼꼼하게 계산했다. 외계행성 천문학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프록시마 b에서 살 만한 세계를 상상했듯, 한국의 과학자들은 꽉 막힌 듯했던 광장이 아직 살 만한 곳이라는 사실을 믿었고, 그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살 만한 곳을 찾아내고, 살펴보고, 가꾸는 일. 2016년은 과학과 정치가 그 임무를 자연스럽게 공유한 해였다. 조금 더 살 만한 곳에서 조금 더 나은 과학을 실천하고, 그 과학이 다시 조금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상상을 만들어내는 선순환을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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