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초의 불꽃과 진리사건 / 고명섭

등록 2016-12-13 17:24수정 2016-12-13 19:12

고명섭
논설위원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을 짐승과 천사, 비참함과 위대함 사이에 놓인 존재라고 말한다. 자기 안에 화해하기 어려운 두 성향을 함께 지녔다는 것, 이 모순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은 갈대처럼 연약해서 아주 작은 힘에도 꺾인다. 갈대 하나를 부러뜨리려고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갈대는 생각하는 갈대여서, 생각의 힘으로 온 우주를 머릿속에 품을 수 있다. 인간은 한없이 비참한 존재이면서 더없이 위대한 존재다. 우리는 짐승과 같은 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도, 어느 순간에 천사처럼 순수해지고 고귀해진다. 인간은 비참함과 위대함 사이에서 꺾이고 일어나기를 되풀이하면서 한 계단씩 올라간다. 때로는 미끄러져 무릎이 까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스스로 놀랄 만큼 돌연한 도약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간다.

국가 공동체도 다르지 않아서, 개인들처럼 인격이 있고 삶의 드라마가 있다. 이 경우에 국가를 대표하고 국민의 집합적 인격을 대리하는 것은 최고 지도자다. 최고 지도자는 국민의 인격을 단순히 대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수준에 맞게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한다. 훌륭한 지도자는 나라의 품격을 높이지만, 지도자답지 못한 지도자는 나라의 품위를 떨어뜨린다. 저급한 지도자는 자신의 낮은 인격을 넘어서는 인격을 용납하지 않는다. 용렬한 지도자 아래서 국민은 물리적으로 탄압당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모욕당한다. 안타깝게도 이 나라 현대사에서 우리 국민은 소수의 지도자를 제외하면 지도자다운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다. 국민을 매질로 다스려야 할 가축으로 본 지도자, 국민을 개처럼 죽이고 짓밟은 지도자, 대통령 자리를 사익추구 수단으로만 생각한 지도자, 그리고 국민이 도탄에서 헤매든 말든 환상 속에서 공주놀음에 빠져 그 환상을 위협하는 일체의 비판과 도전을 억누르고 짓밟은 지도자가 우리의 지도자들이었다. 우리 자신이 그런 지도자들을 만들어냈고 자격 없는 지도자들이 나라와 국민을 대표하고 농락하도록 허용했다. 우리가 우리를 모욕했다.

그 모욕의 끝에서 타오른 것이 광장의 촛불이다. 촛불은 우리 자신의 비참에 대한 저항이었고, 국민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규탄하며 벌인 항거였다. 짐승과 같은 상태를 떨쳐버리는, 자기 부정과 자기 극복의 투쟁이었다. 촛불의 함성이 메아리치는 광장에서 국민은 자신의 비참을 뚫고 일어나 자기 내부에서 숨죽이던 위대함을 향해 돌연한 비약을 감행했다. 자유와 평등과 우애라는 오래된 이념들이 살아서 꿈틀거리며 피어오르는 것을 우리는 초의 불꽃이 넘실대는 바다에서 보았다. 수백만개의 불꽃들이 모여 아름답고 순수한 공동의 삶을 구현하는 순간을 우리는 짧지만 강렬하게 체험했다.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있지 않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며, 누구도 다른 사람을 낯선 타자로 대하지 않는 놀라운 체험이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지도자답지 못한 지도자가 자신의 열등한 인격 수준으로까지 짓누른 우리의 긍지와 자랑스러움을 되찾았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라면 그 체험을 가리켜 ‘진리사건’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촛불의 바다에서 빛이 솟아올라 우리를 환히 비춰주는 것, 자유·평등·우애의 이념이 생동하며 말 걸어오는 것이야말로 진리사건이 아닌가. 촛불이 밝힌 진리가 책 속에 묻힌 이념이 아니라 공동체의 혈관을 채우는 생명의 피가 될 때까지 촛불은 더 높이 더 밝게 타올라야 한다. 촛불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트고 그 길을 비춘다.

michae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