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안 내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그러니까 내게 됐다. 정신적인 분위기적 강제성이 내게 했다.” 1988년 12월14일 ‘일해재단 비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일해재단에 거액을 낸 경위를 이렇게 진술했다. 국회 ‘5공화국 비리 조사 특별위원회’는 일해재단 설립 과정과 재벌 특혜 여부 등의 진상 규명을 위해 그해 11월3일부터 12월14일까지 4차례에 걸쳐 청문회를 열었다. 기업 쪽 증인으로 정 명예회장과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 이준용 대림산업 부회장 등이 나왔다. 일해재단 설립 작업을 주도한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강제성을 부인하자, 마지막 날엔 장 전 실장과 정 명예회장 간의 대질신문도 벌어졌다.
당시 청문회를 통해 자금 모금의 강제성은 드러냈지만, 재벌 특혜 여부는 끝내 밝히지 못했다. 일해재단에 돈을 낸 기업들의 정부 공사 수주, 부실기업 인수, 금융 특혜 등 각종 의혹들은 많았으나, 의원들이 결정적 연결고리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되레 일부 의원들이 재벌 총수들을 ‘증인님’이라고 부르는 저자세를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특히 한 의원은 청문회가 끝난 뒤 퇴장하는 정 명예회장에게 “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몰아붙였죠”라며 출입문까지 열어줘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진상 규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다음달 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8개 그룹 총수와 전경련 회장 등을 불러 청문회를 연다. 7일 청문회엔 최씨 일가와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출석한다. 박근혜·최순실이 30년 전 전두환이라면, 안종범은 장세동쯤 될 것 같다. 또 그때 재벌 총수들의 2, 3세들이 이번에 증인으로 나온다. 강산이 세 번 변하는 시간이 흘렀지만 정경유착의 관행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안재승 논설위원 js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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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2월14일 국회에서 열린 ‘일해재단 비리 청문회’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왼쪽부터)이 증인 선서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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