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혁명으로 찰스 1세가 처형당하고 36년이 지난 1685년 아들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2세의 취임 일성은 의회와 국법을 존중하겠다는 확약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곧 파기됐다. 찰스 1세의 왕권 지상주의를 뒤따른 아들은 4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아버지의 통치에 육박하는 학정으로 신민의 공분을 샀다. 백성에게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고 폭정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로부터는 거액의 뒷돈을 받아 챙겼다. 당시 영국 의회는 제임스 2세가 왕이 되는 것에 찬성한 보수파 토리당과 반대파 휘그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폭군의 전횡이 계속되자 휘그당은 말할 것도 없고 토리당까지 등을 돌렸다. 귀족·평민 할 것 없이 국민 전체가 왕을 거부했다. 어리석은 왕은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압제의 채찍을 휘둘러댔다. 참다못한 영국인들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결혼한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윌리엄은 1만5천명의 병사를 끌고 1688년 11월5일 영국에 상륙했다. 윌리엄의 군대가 런던으로 진군하자 제임스 2세는 12월11일 왕궁을 빠져나가 배를 타고 망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얼굴을 알아본 어부들이 왕을 붙잡아 신고한 탓에 런던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국 국민은 청교도혁명이 낳은 극심한 혼란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이 자리를 내놓고 조용히 도망가 주기만을 바랐다. 12월18일 제임스 2세는 다시 한 번 런던을 탈출해 ‘무사히’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사이 유혈이라고 할 만한 것은 궁지에 몰린 왕이 코피를 흘린 것이 전부였다. ‘명예혁명’은 무혈혁명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4년이 안 돼 온 국민의 버림을 받았다. 비유컨대, 대통령 앞에는 ‘찰스냐 제임스냐’ 하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가야 할 길을 모르고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국민의 인내심도 바닥이 날 것이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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