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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병익 칼럼] 작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등록 2016-10-27 18:21수정 2019-10-17 16:34

“기술이란 개별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누적된 행동을 통해 발전되는 것”이란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말처럼 과학과 기술의 진보란 이 숱하게 자잘한 연구와 작은 재능들 덕분이었다. 나는 숱한 갖가지 진보들이 ‘작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데 다행과 안도를 느낀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지난여름의 더위를 견디게 만든 큰 힘을 나는 안드레아 울프의 <자연의 발명>이 소개한 알렉산더 훔볼트의 발견에서 얻었다. 대학과 교육재단으로 유명한 언어학자 빌헬름 훔볼트도 이름만 들었지만 그의 동생 알렉산더 훔볼트(1769~1859)의 활동과 영향은 여기서 처음 알았다. 그는 남미 북부를 답사하며 당시 세계 최고봉으로 여겨온 6400미터의 침보라소 산을 등정하고 그 식물·동물들을 기후, 지질, 해류와 연관시켜 지구적 생태학을 구축했다. 만물의 양상을 유기적인 상관관계로 연계시킨 ‘생명망’을 그려냄으로써 20세기의 러블록에게 가이아 이론의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그의 화려한 생태지도와 탐사여행기는 다윈을 비글호로 이끌어 갈라파고스 섬에서 진화론을 깨닫는 빌미를 주었다. 그는 대륙판 이동설을 제기했고, 특히 자연과 생물이 인간의 삶과 맺는 관계를 중시하여 오늘날 환경보호라고 부를 여러 연구와 운동의 길을 열었다. 그는 남미 여섯 나라가 ‘국부’로 추앙하는 시몬 볼리바르에게 권고하여 그들이 스페인에서 독립하도록 격려했고, 미국의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제퍼슨의 노예제를 비판했으며, 관료적인 조국 프러시아보다 지적 자유로움으로 활달한 파리를 더 좋아했다.

인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자라고 영국에 살고 있다고 소개된 저자는 이 책으로 ‘엘에이타임스 최우수도서상’을 받을 만큼 이 전기는 내가 보기에도 엄격한 학문적 신뢰감과 지적 품위를 가졌고 문학적으로도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그는 3세기 전의 알렉산더가 돌아다닌 분주한 탐사여행을 치밀하게 기록하고, 그의 저서와 그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진 연구와 기록들을 세세히 따라다니며 그의 분방한 생애와 품 넓은 학문을 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프러시아 왕이 어린 알렉산더가 귀여워 “네 이름의 마케도니아 왕처럼 너도 세계를 정복하겠느냐”고 묻자 그 아이는 “네, 그러나 저는 칼이 아니라 머리로 하겠습니다”라고 재치 있는 대답을 했다는데, 해양시대의 지구적 세계화에 알렉산더 훔볼트가 가장 뛰어난 공헌을 이루었음을 저자는 훌륭하게 보여준 것이다. 나는 이 멋진 전기에서 지식사회사에서 중시해야 할 두 가지 망외의 소득도 얻었다. 지식인들의 어울림과 그들 간의 서간문화다.

지식인들의 모임이란 스티븐 굴드가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다면 기꺼이 인간이기를 그만두고 그 방의 벽에 붙어 있는 파리가 되어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싶어 한” 자리다. 이 진화생물학자가 탐낸 자리는 18세기 말 에든버러의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제임스 와트의 방이고, 벤저민 프랭클린과 토머스 제퍼슨의 미국 건국인들, 레닌과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가, 뉴턴과 핼리의 케임브리지, 헉슬리, 라이엘과 함께 진화론을 토의한 다윈의 집 다운이다. 알렉산더 훔볼트 형제는 예나에서 괴테와 실러 등 당대 최고의 인사들과 어울리며 듣고 배우고 참견했지만 한 세대 가까이 차이나는 그 네 인물의 학문적 인간적 우정은 그들이 작고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과학에도 관심이 컸던 괴테는 알렉산더 훔볼트의 자연 탐사 여행기에 자극받아 소설 <친화력>을 쓰는데, 이들의 귀중한 모임이 마음껏 활기롭던 그 시대는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독일 정신의 열정기였고 영국도 워즈워스를 비롯한 로맨티시즘이 피어나던 시절이어서 그들의 학문과 문학이 더불어 고양되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5만 통의 편지를 썼고 그 두 배의 편지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전화도 없던 시절 먼 거리 소통 수단은 다만 편지였고 서구 지식인들은 참으로 왕성하게 편지들을 쓰고 받으며 토론을 벌였다. 라이프니츠도 4만 통의 편지를 썼다고 하는데 <프로이트>를 쓴 미국 사학자 피터 게이의 참고문헌에는 그의 66년간의 서간문집 외에도 청년기의 친구 플리스를 비롯해 융, 루 살로메, 츠바이크와의 별도의 서간집도 포함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친구들 간의 편지가 수천 페이지라고 정문길 교수는 쓴 바 있는데, 헤이즐 롤리의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한집안에 동거하면서 나눈 뜨거운 사랑과 질투의 편지로만 재구성되고 있다. 훔볼트는 80대에 이르러서도 한 해 4천 통의 편지를 받고 2천 통의 답장을 썼는데, 대개 오전 두어 시간을 정해 편지를 읽고 쓰고 복사하고 보존하는 작업을 했다.

물론 지금도 지식인 예술가들은 전 시대와 다름없이 여전히, 아니 오히려 인구와 장소와 방식이 더 늘어나고 다양해졌기에, 더욱 활발하고 역동적이리라. 우리나라도 3·1독립운동기의 보성학교 숙직실이나 <창조> 동인들의 동경 김동인 하숙집에서부터 시작한 것과 같은 동지-동호인 모임들이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에도 곳곳에서 더없이 젊은 열기로 왕성하게 벌어지고 이메일과 카톡 등의 갖가지 새로운 글쓰기와 말하기 방식으로 대화와 논쟁, 교류와 협력을 쌓고 있을 것이다. 너무 빠른 소통 속도와 다양한 교환 수단들이 오히려 지적 진지함과 뜨거운 토론들을 가볍고 허술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이미 한물간 아날로그 세대의 내 낡은 질투겠지만, 그럼에도 전날의 고전적인 모양의 모임과 소통 방식이 지닐 품위와 진지함이 서린 앞 세기의 지적 풍토에 대한 부러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시대는 그 시대적 표현 수단과 양식을 가지기 마련이기에 18세기와 21세기의 모임과 소통 형태들도 달리 되어야 할 것도 인정해야 하리라.

이 <자연의 발명>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훔볼트의 생애뿐 아니라 그의 영향과 자극으로 후속된 학문적, 사상적 진전 과정들을 소개하고 있는 점이다. 학문으로서의 생태학, 삶의 방식으로서의 자연사상, 지구 보전을 위한 환경보호 등 ‘지속 가능한 지구’의 보존 운동과 사상이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 설명 중에, 저자는 진화론으로 인간관을 근본적으로 전복한 다윈이 “맬서스와 알렉산더 훔볼트의 두 거인 어깨 위에 서 있었다”고 말한다. “거인의 어깨 위”란 원래 갈릴레이를 염두에 두고 뉴턴이 겸양한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에드워드 돌닉의 <뉴턴의 시계>에 의하면 그 비유는 뉴턴이 자기를 헐뜯는 로버트 훅의 ‘곱사등이에 가까웠던 구부정한’ 체구를 빗대 비아냥한 말이었다.

모든 진보가 그렇지만 과학은 특히 앞 시대의 크고 작은 성과들 위에서 가능하다. 뉴턴이 태어나던 해에 별세한 갈릴레이나, 다윈이 “이제는 존경을 넘어 숭배”하기에 이른 훔볼트 같은 앞선 거인이 있어 그 어깨에 오른 더 큰 거인이 더 먼 앞을 내다보고 있는 형상인데, 거꾸로 보면 그 거대한 업적들은 좀더 앞선 숱한 작은 거인들과 범연한 인재들의 발랄한 창의와 집요한 노력 덕분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1769년의 제임스 와트 증기기관도 1698년 세이버리의 증기기관, 1712년 뉴커먼의 증기기관 등 앞선 개발들의 연쇄를 거쳐 이루어졌다. 뉴턴과 갈릴레이도 중세의 화형대에 오른 이단자들과 연금술사들 위에서 거인이 되었고, 다윈과 ‘다윈 이전의 다윈주의자’ 훔볼트도 생물학자 린네와 항해가 제임스 쿡 등 앞선 이들이 열어준 길을 밟고 사다리를 오른 것이다. “기술이란 개별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누적된 행동을 통해 발전되는 것”이란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말처럼 과학과 기술의 진보란 이 숱하게 자잘한 연구와 작은 재능들 덕분이었다. 나는 숱한 갖가지 진보들이 ‘작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데 다행과 안도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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