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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오태규 칼럼] 트럼프보다 더 위험한 ‘한국의 트럼프’

등록 2016-10-19 18:00수정 2016-10-19 20:17

오태규
논설위원실장

한국 안의 트럼프 현상이 미국의 트럼프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트럼프의 어법을 빌려 표현하자면 “미국의 트럼프는 아직 말뿐이지만, 한국의 트럼프 현상은 지금 현실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한국의 트럼프가 미국의 트럼프보다 더 ‘명백하고 현존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미국 대통령선거전에 텔레비전 토론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60년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과 민주당의 존 에프 케네디 후보의 대결 때였다. 당시 열세에 있던 케네디는 이성과 논리보다는 감성과 이미지가 크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텔레비전 매체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앞서가던 닉슨에게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새로운 미디어인 텔레비전이 선거 판도를 바꾸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는 점에서 정치커뮤니케이션 교과서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사례다.

미국에선 사상 첫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이자 여러모로 선거사의 새 장을 연 이 토론을 영어 대문자를 써, 대토론(Great Debate)이라고 부른다. 이 토론이 미 대선 토론의 원형을 제시했고, 케네디와 닉슨이라는 두 토론자의 품격과 지적 수준도 최상급이었다는 점에서, 다소 호들갑스럽긴 해도 ‘그레이트’라는 수식을 받을 만하다. 반면 지난 10월9일(현지시각) 열린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간의 제2차 텔레비전 토론은 미 대선 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토론(Dirty Debate)으로 기록될 것이 확실하다. 아직 19일(현지시각)의 마지막 3차 토론이 남아 있긴 하지만.

물론 2차 토론을 저질 막장 쇼로 만든 책임은 전적으로 트럼프에게 있다. 힐러리가 얘기할 때 손짓과 잡음을 넣으며 먹잇감을 노리는 사자처럼 어슬렁거리는 위압적인 태도도 토론자로서 자격 미달이지만, 더욱 가관인 것은 그가 토론 과정에서 쏟아낸 반민주적이고 교활한 말과 생각이다. 나는 트럼프가 2차 토론에서 보인 언행의 거의 전부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법과 제도를 무시하는 무법적인 언사, 논점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책임을 전가하려는 적반하장의 뻔뻔함 두 가지가 토론을 최악으로 전락시킨 주범이라고 판단한다.

2차 후보 토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답변을 하고 있는 도중 뒤쪽에서 트럼프가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보고 있다.
2차 후보 토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답변을 하고 있는 도중 뒤쪽에서 트럼프가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보고 있다.

트럼프는 힐러리의 개인 이메일 삭제 건을 거론하며 “내가 대통령이 되면 특별검사를 임명해 당신을 감옥에 보내겠다”는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의 사법 제도를 깡그리 무시한 폭언이다. 이에 많은 정치학자가 법과 제도를 사유화했던 1930년대 파시스트 국가의 지도자들이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같은 독재자나 할 법한 망발이라며 경악했다. 민주주의의 최고 모범국이라는 미국에서 법의 지배와 제도의 안정성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위협하는 이런 흉악무도한 발언이 나온 것만으로도 미국의 치욕이자 민주주의의 수치다.

그는 2차 토론에 앞서 터진 성희롱 테이프에 대해서는 “탈의실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얼버무린 뒤, 힐러리를 향해 “나는 단지 말뿐이었지만, 빌은 행동으로 했다”고 되레 역공을 펼쳤다. 마치 자신의 도둑질이 비난받자 상대 남편의 악행이 더 문제라는 식의 교활한 책임 전가다.

그런데 이런 반민주적인 작태와 후안무치의 책임 전가는 트럼프만의 고유한 속성일 뿐이고,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일까. 지금 바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수한 ‘트럼프 데칼코마니’ 현상에 눈감지 않은 담에야, 결코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나라를 들썩이고 있는 ‘측근 실세' 최순실씨 비리가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데도 ‘근거 없는 정치 공세'라며 딴청을 부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나라를 들썩이고 있는 ‘측근 실세' 최순실씨 비리가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데도 ‘근거 없는 정치 공세'라며 딴청을 부리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애먼 간부들이 대통령의 “나쁜 사람” “아직도 그 사람이 거기 있어요”라는 말 한마디에 법이 보장하는 근무 연한을 채우지 못하고 쫓겨나고, 수천의 문화·예술인들이 정권에 비판적인 의견을 표출했다는 이유만으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갖은 불이익을 받는 나라가 과연 트럼프의 반민주적인 언행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대통령의 비선 실세 최순실씨와 그가 새끼를 친 차은택이라는 사람이 정체불명의 재단과 단체를 뚝딱 만들어 나라 안팎, 정부 부처, 기업을 가리지 않고 불가사리처럼 갖은 이권을 폭풍 흡입하고 있는데, 그것도 구체적인 정황과 증거와 함께 제기되고 있는데도 ‘안보, 경제 위기 속의 근거 없는 국론분열 행위’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과연 트럼프의 적반하장보다 덜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 안의 트럼프 현상이 미국의 트럼프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트럼프의 어법을 빌려 표현하자면 “미국의 트럼프는 아직 말뿐이지만, 한국의 트럼프 현상은 지금 현실에서 한창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데 있다. 더구나 미국의 트럼프는 자승자박적인 행동으로 점차 당선 가능성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트럼프보다 한국의 트럼프가 더 ‘명백하고 현존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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