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10월13일 밤,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 결정 소식을 전하는 한 티브이 방송은 그의 노랫말의 시적인 성취를 언급하며 이런 말로 끝맺었다. “대중음악의 최고봉이었던 밥 딜런은 이제 문학에서도 최고봉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노벨상은 상 중의 상이므로 이 상을 받은 사람은 그 분야의 최고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얼핏 당연해 보이는 이 진술은 기묘한 점이 있다. 밥 딜런의 수상 소식은 한 지인을 흥분시켰다. 밥 딜런의 모든 정규 앨범을 구입해왔고, 그의 어떤 노래가 어느 앨범에 수록된 몇 번째 곡인지도 정확히 기억하는 이 열렬한 딜런 광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21세기가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딜런의 많은 노래를 좋아해온 나는 지인의 흥분을 이해하고 어느 정도 공감했지만 그 말에는 언뜻 수긍이 되지 않았다. 내게는 이 수상 결정이 합당한지 판단할 수 있는 문학적 전문성이 없다. 다만 내가 특별하게 멋지다고 생각해온 한 광대에게 콧대 높은 노벨상이 주어진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꼈다. 딜런의 특별함은 그가 마치 자신의 어제는 없다는 듯 노래해왔다는 데 있다. 이것이 그의 주변 사람들과 그의 팬들을 당황케 했고 적들도 만들었다. 2010년 3월31일 그의 첫(아마도 마지막이 될) 내한공연장을 찾은 나는 딜런이 저 유명한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를 부르고 있는데도 무슨 노래인지 몇 소절이 지나도록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노래를 비트가 강한 블루스로 완전히 바꿔 불렀기 때문이다. 실은 그가 그날 공연의 전곡을 이런 식으로 불러서 공연에 적응하는 데 꽤 시간이 필요했다. 1960년대에 딜런과 함께 활동한 피터 폴 앤 메리의 80년대 초반 미국 공연 실황을 담은 동영상에서, 그들이 마지막 곡으로 “우리 세대의 영원한 성가를 부르겠다”며 특유의 부드럽고 감상적인 톤으로 ‘블로잉 인 더 윈드’를 노래할 때, 거의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관객들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장면을 기억한다. 그걸 보던 나도 눈물이 났다. 딜런은 이런 장면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므로, 내게 추억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일관성에 대한 완강한 거부 그리고 현재에 대한 맹렬한 몰두의 태도가 토드 헤인즈가 그를 모델로 만든 영화 <아임 낫 데어>(2007)에서 딜런을 여섯 명의 서로 다른 배우들로 나눠서 표현한 이유일 것이다. 딜런이 노벨상을 받음으로써 정말 문학에서도 최고봉이 되었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상이 정말 문학적으로 합당하게 주어졌다면, 상식적인 문학계의 범주 밖에서 최고의 문학을 찾아낸 노벨상이 최고의 상이 된 것이다. 예술 작품에서 최고라는 수식어는 상이라는 제도의 피조물이 아니다. 상은 최고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한다. 제대로 발견된 것은 그 발견으로 최고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최고이다. 발견은 상의 미덕이 아니라 의무이다. 그것이 제대로 된 선정이라면, 노벨상은 상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한 흔치 않은 사례를 보여준 것일 뿐이다. 딜런의 노벨상 수상은 정말 21세기가 멋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일까. 동의하기 쉽지 않다. 혹시 그 반대는 아닐까. 그 선정이 합당하다면 21세기에 쏟아진 그 많은 문학들이, 이 20세기 가객의 노랫말의 성취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되는 건 아닐까. 이것이 정말 21세기의 좋은 소식이기만 한 것일까. 답은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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