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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재난의 응시 / 이명원

등록 2016-09-30 17:26수정 2016-09-30 20:26

이명원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규모 5.8의 경주 강진이 발생한 이후 국민안전처의 대응은 무력했다. 혹여 대재난이라도 발생한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재난을 어떻게 응시할 것인가의 문제는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탐구에서도 중요한 의제이다. 한계상황 속에서 우리는 인간과 사회의 의미를 묻고 국가의 본성을 성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인간의 조건’을 묻는 일이 된다.

재난이란 현상 자체는 비극이지만, 거기서 희망도 발견할 수 있다는 모순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 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리베카 솔닛이다. 한국에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그녀의 책은 세월호 대참사 이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그녀가 이 책에서 제기한 가장 흥미로운 주장은 재난의 파괴적 힘의 다른 측면, 즉 기존 질서를 뒤집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재난 유토피아’를 구성하는 힘도 있다는 것이 아닐까.

1906년 4월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사상자는 20여만명에 이르렀다. 하나의 재난은 또 다른 재난을 부르는 복합재난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도시 기능은 마비되었고 국가 행정기능 역시 작동하지 않았다. 이런 아수라장의 혼란 속에서 리베카 솔닛이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떠올린 이유는 재난에 대응하여 시민들이 즉흥적으로 벌인 구조활동과 대피소와 자율적 공동체의 형성에서 본 희망 때문이다. ‘소유’에 대한 관념 대신 ‘생존’을 선택하게 되자, 대도시 안에서 분리되었던 사람들 사이에 ‘정서적 유대감’이 생겼고, 이것이 비통한 재난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재난 공동체에서 배제된 자도 있었음을 섬세하게 주목해야 한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이주했다가, 1907년 샌프란시스코로 밀항했던 안재창 가계와 한인들의 미국 이민사를 기록하고 있는 <1902년, 조선인 하와이 이민선을 타다>에는 이 시기의 백인계 미국인들이 조선인이나 중국인을 포함한 동양인들에게 대해 어떤 멸시적·배제적 감정을 끈질기게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기록되어 있다. 1906년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백매리(Mary Paik Lee)가 남긴 기록의 일부는 이렇다.

“우리가 샌프란시스코에 1906년 12월에 도착해 배에서 선창으로 내려갈 때 젊은 백인남자들이 서성거리며 구경거리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웃으며 우리들의 얼굴에 침을 뱉고 엄마의 치마를 발로 걷어차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이름으로 우리를 놀렸다.”

대지진 8개월 후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조선인들을 포함한 동양계 이민자들에게 ‘재난 유토피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거대 재난은 일시적으로 상호부조적 공동체를 형성하게 만들지만, 이조차도 다수자의 공동체이며, 특히 국가권력이 재난 복구를 명분으로 자발적 공동체를 제압하고 비상사태 선언 등을 통해 치안권력을 강제하기 시작하면 그 즉시 원래의 디스토피아 상황으로 돌아가게 된다.

재난 유토피아는 재난 직후 일정 기간 동안 마술적으로 구성될 수 있으나, 역시 명백한 것은 그 이전에 생활세계의 전반적인 조직 원리가 유토피아적 요소를 머금고 있을 때만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상이 재난상황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는 재난 속의 유토피아가 구성되거나 지속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는 위험사회의 임계치에 도달해 있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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