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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민편집인의 눈] ‘여성’대통령 사용 설명서 / 김예란

등록 2016-09-28 16:01수정 2016-10-20 08:32

‘여성’ 대통령에 관한 사용 설명서라는, 자칫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제목에서 불편한 독자가 혹 계실지 모르겠다. 호의의 노파심에서 설명을 곁들이자면 여기서 사용 설명서는, ‘루저문학’의 정수라는 평가를 받은 전석순 소설가의 <철수 사용 설명서>의 제목에서 빌려 왔다. 철수는 취업, 연애 등 청춘사업의 모든 방면에 실패한 후 세상에 대해 무용하게 된 불운을 한탄하며 자신이 제대로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을 알리게 되는데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철수의 ‘사용 설명서’다. 사용 설명서에는 철수라는 인물의 사용주의서, 사용후기, 환불이나 교환 방법들이 친절히 소개되어 있다.

타당한 의혹 제기를 ‘폭로성 발언’으로, 비판을 ‘비방’으로, 논쟁을 ‘국기문란’이라고 밀쳐내면서 거부, 묵살, 분노, 궤변 말고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신경증적인 박근혜 대통령에게선 무언가 크게 잘못된 고장의 징후가 농후하게 나타난다. 루저 청와대를 수리하고 개선하기 위한 사용 설명서가 필요하다.

■‘여성’이면서 ‘정치인’

전통적으로 정치는 합리적인 이성과 숙의가 중시되는 ‘남성적’인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요즘은 그 성격이 크게 바뀌고 있다. 정치와 엔터테인먼트가 결합하고 정치인과 셀레브리티 현상이 중첩되며 정치적 지지가 팬덤과 섞이는 분위기에서 정치인에게는 정책 못지않게 이미지가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된다. 이와 맞물려 과거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인바, 여성 정치인들이 세계적으로 부상하는 과도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의 접점에서 여성 정치인의 위상과 성격은 남성의 경우보다 한층 더 모호하고 복잡하다.

여성 정치인들이 남성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공인으로서 정치적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한편 여성성이 강조되는 셀레브리티의 역할까지 겸하기를, 대중들은 요구하고 욕망한다. 그래서 여성 정치인은 때로는 매우 엄격, 정확하고 사무적이며 근면한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때로는 근사하고 매혹적인 여성적 이미지로 표출되기도 한다.

미디어에서 여성 정치인이 과잉된 자기 통제로 인해 억제되고 권위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만 동시에 농담과 조롱의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식의 분리 현상을 겪는 이유도 유사한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강성이든 연성이든 자연스럽지 않은 과도함의 전형으로 여성 정치인이 표상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영국의 테리사 메이 총리,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 등의 유명 여성 정치인들이 여성성과 정치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이력은 익히 알려져 있다.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는 핏대 세워 날카롭게 퍼붓는 공격적이고 똑똑한 ‘여성’ 이미지만 줄인다면 도널드 트럼프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농담 반 진담 반 전망이 나올 정도로 그녀의 정치생명은 여성성 조절 수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테리사 메이 총리 경우는 후보 경쟁자였던 앤드리아 레드섬이 ‘자녀가 없는 메이보다는 내가 총리로서 훨씬 적합하다’는 망발을 하며 총리로서 인격 미달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결국 후보직에서 사퇴함으로써, 역으로 쉽게 총리직에 오를 수 있었다. 모성성에 대한 편견과 그에 대한 반동이, 자녀가 없는 그녀에게 오히려 정치적 이점으로 작용한 셈이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일 중심적이고 활동성 강한 이미지로 유명하다. 그 대가로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외모 관리에 있어선 투박하고 덜렁거리는 인물로 조롱받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미디어학자 리스벳 판조넌의 연구에 따르면, 여성 정치인은 개인사와 여성성의 측면을 억제하는 식으로 정치인으로서 성공을 일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는 성적인 매력이 정치적 장점으로 추가되는 남성 정치인들과 대비되는 측면이다. 여성 정치인의 경우에 여성적인 매력이 부각되면 연약하거나 정치라는 큰일을 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정치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여성성을 통제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정치계는 여전히 남성지배적이며, 탈여성화 전략은 이러한 맥락에서 여성 정치인들이 발휘하는 일종의 자기 보호-강화 장치라고 이해할 수 있다.

■ 부패한 청와대와 비틀어진 여성성

박근혜 대통령은 동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여성 정치인으로 등장했지만 지금의 상황은 매우 일그러져 있다. 각종 권력형 비리 의혹 속에서 박 대통령은 독단과 부패에 빠진 여성의 전형이 되어가고 있다. “혼자서는 옷을 사지도, 머리 손질을 하지도 못하”고, “부모 잃고, 친동생들과도 사이 틀어지고, 그 자신 결혼도 하지 않”은, 비정상적으로 고립된 인물로 그려진다. 그 때문인지 “주얼리숍에 가서 브로치 사다주고, 옷 맞춰주고, 관저에 들어가서 같이 밥 먹고 연속극 보”는(<한겨레> 9월24일치) 친구가 비리의 원천으로 성장하도록 방관 또는 공모한, 나쁘거나 무능력하거나 혹은 둘 다 모두인 정치인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담론에 가부장적인 시각이 섞여 있다는 점은 일단 논외로 하자. 다른 어떤 시각에서 보더라도 청와대가 지극히 불량한 상태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 큰 비극은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의 결함을 여성 셀레브리티로 갚으려는 무모한 욕망을 펼친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유별난 해외 순방 취미는 이미 세간에 유명하고 ‘한복외교’라는 이름 아래 ‘한복 입고 세계 무대에 나가는 것’을 뿌듯하게 즐기는 모습도 널리 알려졌다. 이는 정치인과 셀레브리티의 역할 사이에서, 정치인으로서는 모르쇠로 밀어붙이는 한편 연예계 스타처럼 주목받는 여성으로 스스로 띄우는, 분열적이고도 허황된 ‘여성’ 정치인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대통령의 고장 때문에 대통령 보도 기사 역시 참담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대통령 관련 기사는 부재, 침묵, 거부, 오만, 고집 등 불통과 강압을 표현하는 어휘들로 가득 차 있다. 사실이 그러하니 이렇게 말하는 언론을 탓할 수만도 없다.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이 수행하는 정책 및 정치효과에 관한 뼈있는 언설은 증발된 지 오래다. 건강한 정치 담론이 사라진 자리엔 ‘문고리’, ‘오장육부’같이, 비틀어진 여성성을 떠받드는 부패한 기운을 뜻하는 역겨운 상징어들이 난무한다.

여성 정치인이라는 새로운 싹이 제대로 크기도 전에 고사할까봐 우려스럽다. 청와대가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지기 전에 한국 사회에 미비한 여성 정치인의 사용 설명서를 기본부터 충실히 마련해야 할 때다.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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