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인상파에 속했던 화가 드가는 20여편의 뛰어난 소네트를 남긴 시인이기도 했다. 시작에 열중하던 드가는 어느 날 친구인 시인 말라르메를 만나 이렇게 불평했다. “하루 온종일 빌어먹을 소네트에 매달렸는데 한 발자국도 못 나갔네. 하지만 생각이 모자라는 건 아니라네… 그건 많이 있어… 지나치게 많거든….” 그러자 말라르메가 대답했다. “하지만 드가, 시는 생각을 가지고 만드는 게 아니라, 말을 가지고 만드는 거라네.” 말라르메의 대답은 모더니즘 예술의 기치 하나를 요약한다. 하나의 예술작품은 다른 무언가를 의미하는 매체가 아니라, 그 자신이 온전한 하나의 자율적 세계라는 것이다. 영화감독 중에서도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있다. 앨프리드 히치콕은 “많은 감독들은 인생의 단편들을 영화로 만들지만 나는 케이크 조각들을 영화로 만든다”고 말하곤 했다. 케이크 조각(a piece of cake)이 너무 사소해서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미하지만, 시에서의 단어 혹은 문장에 대응하는 영화에서의 숏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히치콕의 말은 말라르메의 시론의 영화적 번안인 셈이다. 히치콕의 저 유명한 말을 다시 생각나게 한 건 지난 8월25일 소규모로 개봉한 <히치콕 트뤼포>이다. <히치콕과의 대화>라는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인터뷰 책을 낳은 히치콕과 프랑수아 트뤼포의 교감과 우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켄트 존스가 만들었지만 내용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마틴 스코세이지, 제임스 그레이, 데이비드 핀처 등과의 인터뷰는 흥미로웠지만, 영화의 대부분은 <히치콕과의 대화>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다만 한 가지가 머리를 맴돈다. 끝부분에 말년의 히치콕이 트뤼포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 소개된다. “가끔 나는 당신이 되어 내가 원하는 걸 하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세잔을 그려보려는 몬드리안 같다고 할까요.” 세잔을 그리려는 몬드리안. 그 뜻을 짐작하기 쉽지 않은 말이다. 영화의 내레이터는 이 구절을 ‘예술가인가, 엔터테이너인가’라는 오래된 질문과 연관시키고 있지만, 더 오래된 또다른 질문을 떠올려볼 수도 있다. 몬드리안은 풍경화에서 출발했지만 수직선과 수평선 그리고 삼원색으로만 이루어진 특유의 추상화를 자기 예술의 완성으로 제시했다. 히치콕은 자연의 조각이 사라진 그의 추상화를 ‘케이크 조각들’로 만든 자신의 영화와 동일시했던 것 같다. 반면, 세잔은 자연을 원기둥과 구, 원뿔의 형상으로 포착한 기하학적 화풍을 개척함으로써 20세기 회화의 선구자로 받들어지지만, 자연의 조각을 버린 적이 없다. 그는 마지막까지 엑상프로방스의 작은 언덕에서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리고 또 그렸고, 죽기 한달 전에도 “나는 아직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있다”고 썼다. ‘자연과 예술의 합일’(세잔), 혹은 사물의 인상이나 객관적 형상이 아닌 ‘사물의 실체성’(메를로 퐁티)을 향한 세잔의 분투에서 히치콕은 자신이 시도하지 못한 이상적 예술가의 꿈을 보았던 것 같다. 물론 히치콕의 열렬한 옹호자라면, 그의 영화의 케이크 조각이야말로 또다른 의미에서 삶의 조각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년의 히치콕은, 내가 스스로 만든 형식의 포로가 된 것이 아닌가, 라고 자문했다고 한다. 더 바랄 것 없는 성취를 이미 이룬 노감독은 아마도 구체와 추상의 합일이라는 또다른 그리고 영원한 예술적 이상을 꿈꾸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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