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은
대중문화팀 기자
만듦새가 화제인 다큐드라마 <임진왜란 1592>(한국방송1)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따로 있다. 주연, 조연, 단역 가리지 않고 모든 등장인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김한솔 피디는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 장군부터 격군까지 이름과 전공이 나와 있다”고 했다. 아무리 기록이 있더라도 비중 적은 배역까지 고유의 이름을 주는 드라마는 거의 없다. 양 형사, 할머니, 김 과장, 군사1…. 조연과 단역들은 주로 그렇게 불린다. 대본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드라마 속 ‘무명’들은 촬영장에서도 이름이 없다. “어이, 군사들” “아줌마 이리 오세요” 등 누구도 배우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승자독식의 연예계에서 이름이 없다는 것은, ‘막 대해도 되는 존재’로 해석되기도 한다. 단역들은 기다리기를 반복하고, 주연에 휘둘리며, 때로는 제작진의 막말도 참아야만 한다. 한 배우는 “주연 편의 봐주느라 촬영이 계속 밀려, 오전에 와서 종일 기다려서야 찍고 간 적도 있다”고 했다. 정작 이들은 조금이라도 늦으면 피디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야, 이 ××야 내가 너 오기를 기다려야겠냐!” 따질 수도 없다. 그랬다간 바로 “얘 잘라!”가 나온다. 무명은 하루살이보다 못하다.
최근 방송사가 어려워지면서 가장 먼저 칼바람을 맞는 것도 그들 조연과 단역들이다. 주연급 몸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제작비를 줄이려고 그들이 많이 맡는 할머니, 아버지, 삼촌 등의 배역을 죄다 없애버린다. 드라마에서 편모, 편부 가정이 느는 것도 그 때문이고, 조연과 단역 출연이 가장 많은 대하사극에서 “전하~”라고 외치는 장면이 준 것도 무관하지 않다. 이별의 예의 또한 실종됐다. 다짜고짜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는 문자 통보로 끝이다. 최근 촬영 직전 제작이 취소된 <정약용>(한국방송1)을 두고도 과연 한류 스타가 나왔더라면 그랬을까 뒷말이 나온다.
그렇다고 조연, 단역이 엄청난 비용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다. 연기는 조연이 하는데, 돈은 주연이 가져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주연은 회당 2천만원 이상이다. 1억원을 받는 배우도 있다. 1주일에 2회 방송을 기준으로, 한 달에 적어도 1억6천만원을 가져가는 것이다. 그나마 유명한 조연들은 회당 500만원 남짓이지만, 이름 없는 이들은 수십만원(보조출연자 제외)도 받는다. 고정이 아니면 언제 나올 지도 모른다. 이마저도 드라마가 실패하면 조연 돈부터 떼인다. 출연료 미지급이 많은 요즘 주연에게 50% 선지급도 한다.
그런데도 이들이 참고 견디는 이유는 연기는 곧 삶이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려고, 인기를 얻으려고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연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니 참을 수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현장에서 대접받지 못해도 묵묵히 내 일을 하는 게 그저 행복하다고 한다. 연기만 바라보고, 진심을 담아 연기하는 그들 덕분에 주연이 빛나고 드라마의 완성도는 한층 높아진다. <옥중화>(문화방송)에 출연한 한 배우는 말한다. “이병훈 피디가 현장에서 ‘○○씨’ 하고 보조출연자들 이름까지 불러주는데 배우로 인정해주는 것 같아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임진왜란 1592>에 출연한 배우는 또 이렇게 말한다. “역할에 이름이 있다는 건, 현실에서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나를 같은 배우로 바라봐준다는 생각에 힘이 난다.”
지난 8일 <함부로 애틋하게>(한국방송2) 마지막회에서는 가슴 먹먹한 장면이 스쳐갔다. 극 중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지난 4월 울진에서 촬영 뒤 집으로 가던 중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이송됐고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1971년 한국방송 공채 9기로 데뷔해 45년간 드라마와 영화, 연극판을 누볐지만, 우리는 그의 이름을 잘 알지 못했다. 그가 떠난 뒤 비로소 이름 세 글자가 브라운관을 채웠다. ‘배우 고 김진구 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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