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뉴스팀장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저녁 자리에서 휴가 얘기가 나왔다. 내가 바다에서 웃통을 벗고 수영을 한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여성 후배가 ‘헐~’ 하며 밥맛 떨어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배, 주변 사람들 생각도 좀 하셔야지.” 뭇사람들 눈 버리게 하지 말고 래시가드를 사 입으라는 얘기였다. ‘식스팩’도 없는 주제에 남들 배려 좀 하라는 타박이었다. 평소처럼 휴가를 떠났다가, 그래도 께름칙해 휴가지 근처에서 래시가드를 구입했다. 해변에 도착해 바다에 들어갈 때에야 ‘잘 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훌러덩 웃통을 벗고 물놀이를 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가끔 맨살을 드러낸 ‘배둘레햄’을 보면 ‘무슨 자랑이라고, 쯧쯧’ 혀도 찼다. 필리핀 세부에 다녀온 한 동료는 해변에서 래시가드를 입고 있는 사람들은 다 한국인이었다고 했다. 래시가드에 워터레깅스까지 입은 이들도 많았단다. 등산복이 한국인 관광객들의 상징이었던 것처럼, 이젠 외국 바닷가에서 래시가드가 한국인의 상징이 된 듯하다. 그렇다고 아무 해변에서나 이런 차림을 해서는 안 된다. 특히 프랑스의 이름난 지중해 해변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봉변을 당할 수 있다. 프랑스 지중해 해변의 지방자치단체들이 부르키니(부르카와 비키니의 합성어로, 무슬림 여성의 전신 수영복) 착용을 금지했다. 니스 해변에서 부르키니를 입은 여성한테 경찰들이 다가와 옷을 벗으라고 하는 사진도 널리 퍼졌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워터레깅스에 래시가드 차림과 부르키니 차림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워터레깅스+래시가드+수영모=부르키니’ 같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옆자리의 동료 여성 기자에게 “워터레깅스에 래시가드를 입고 프랑스 해변에 가면 어떻게 될까” 하고 물어보니 “경찰이 달려와 당장 벗으라고 할 것 같다”고 한다. 실제 이런 일을 겪게 되면 어떨까. ‘내가 래시가드를 입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맵시도 모르는 촌놈들’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프랑스 자치단체들의 미적 감각은 남다르다. 부르키니가 공공질서를 위협하고 위생상 문제가 있단다. 여성의 억압을 상징하고, 해변에서 여성의 몸을 가리는 것은 세속주의에 대한 도발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반면, 부르키니를 최초로 고안한 레바논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디자이너 아헤다 자네티는 “부르키니는 자유와 행복”이라고 한다. 부르키니 덕분에 가족들과 함께 처음으로 해변에서 물놀이를 즐겼다는 무슬림 여성도 많다. 거창하게 여성 억압과 세속주의에 대한 도발을 거론하지만, 부르키니 착용 금지는 최근 프랑스에서 잇따랐던 테러에 대한 두려움과 이슬람 혐오의 산물이다. 프랑스 최고 행정법원은 “기본적인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했다”며 부르키니 착용 금지가 부당하다고 밝혔다. 이에 지자체들은 불복을 선언했고, 내년 대선을 앞둔 프랑스 정치권 인사들도 한마디씩 거들고 있다. 항상 논란이 되는 것은 여성의 옷차림이고 여성의 몸이다. 남성이 아니다. 부르키니 논란은 여성의 옷차림이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여성의 어떤 옷은 허용되고 어떤 옷은 안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권력이고, 신의 이름을 빌리든 아니든 그 권력은 남성이다. 여성 의복을 연구해온 미국 라스베이거스 네바다대의 디어더 클레멘티 역사학 교수는 <뉴욕 타임스>에 “권력을 가진 자들은 ‘여성의 이익을 위해 (비키니나 부르키니 관련) 규정을 만든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여성들은 스스로 자신의 외모를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키니든 부르키니든 스스로 결정하니, 참견하지 말라.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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