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그들은 떼를 지어 죽는 역할만 할 엑스트라들이기에 그들의 존재감은 무시될 정도였으며 거기에 어울리게 말도 없고 연기도 아닌, 대부분 어색한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그 엑스트라들의 무심한 얼굴들이 뜻밖에 앳되고 천진한, 그래서 오히려 더욱 싱싱한 표정들로 확대되어 다가왔다. 알파고의 여진으로 그 방면 책 두어권 더 읽고 나서 나는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을 멈추었다. <휴먼 3.0>(피터 노왁)과 <제4차 산업혁명>(클라우스 슈밥)의 세상은 다가오는 중이겠지만, 내가 바라지 않는, 적어도 내 생애 이후에나 오기를 바라는 세계이고 그 세계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피터 노왁이 인용한 “우리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많은 것을 제거했지만 또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는 말에서 편안을 대가로 행복을 단념해야 하는 사실에 동의하면서 비평가 김주연이 호그와트의 환상과 알파고의 인공지능을 보며 “환상과 기계는, 말하자면, 새로운 리얼리즘이다”(<사람 없는 놀이터에 사람들을!>)라고 문학에 새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발언에 공감하면서도 그 새 현실주의에의 이질감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어차피 나는 ‘보수꼴통’이어서 내 주책없는 돈키호테식 독서를 버리고 ‘현재진행의 미래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그 미래 대신 든 것이 거꾸로 관중의 <삼국지>였다. 읽은 게 아니라 디브이디로 보았다. 28장의 중국제 화면은 밝지 않았고 자막의 고유명사들은 우리가 익힌 한자 아닌 중국어 발음이어서 줄거리를 자주 놓치기도 했지만 소년 시절에 읽은 삼국지의 기억에 맞추어 무불통지한 제갈공명의 전략에 다시 감탄하며 몇 주의 밤을 즐겼다. 한 장에 두 시간짜리 그 디브이디에서 나는 “이 디지털 시대에 누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같은 대서사를 읽을 것인가”라던 미국 지식인의 말을 겸연쩍게 씹으면서, 그러나 책에서 볼 수 없었던 뜻밖의 실감나는 장면에 신선감을 느꼈다. 소설이라면 가령 적벽에서 조조가 몇만명의 병력을 잃었다는 숫자로 넘겼을 대목의 화면에서 나는 수많은 엑스트라들의 살아 있는 얼굴들을 보았던 것이다. 화살과 창으로, 불길과 물살로 곧 목숨을 잃을 그들은 말과 연기가 필요하지 않고 떼를 지어 죽는 역할만 할 엑스트라들이기에 그들의 존재감은 무시될 정도였으며 거기에 어울리게 말도 없고 연기도 아닌, 대부분 어색한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그 엑스트라들의 무심한 얼굴들이 뜻밖에 앳되고 천진한, 그래서 오히려 더욱 싱싱한 표정들로 확대되어 다가온 것이다. 영화 속의 장면에서나 역사의 실제에서나, 그들은 분명 필요한 사람들이지만 이름이나 개성은 필요 없는, 숫자 속의 하나로 포함시켜도 그만일 존재감 없는 인간들이었다. 이 세상에서 이름 없이 지워질 그 클로즈업된 얼굴들은, 그런데 내게 오히려 그 숱한 무명인들의 ‘유구한 역사’들을 새삼 실감시켰다. 이 민중들에 의해 역사가 이루어졌으리라, 그들의 삶과 죽음이 거대한 역사의 덩어리를 쌓았으리라. 이름 없는 그 모두는 얼마나 애틋한 사연들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았을까. 그 숱한 사람들이 지녔을 뜻밖의 그 존재감을 김경욱의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다시 확인했다. ‘묻지 마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이 장편은 1982년 경남 의령의 한 경관에게 피살된 55명의 주민들이 이유 없이 목숨을 잃기까지 그들 나름의 아기자기한 삶의 생기를 피우고 있었다. 그 발랄한 생애들이 이렇게 덧없이 무고한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밀려나 역사에서 잊힌 ‘장삼이사의 잉여인간’으로 실종되고 말았구나. 그 냉혹한 사실이 참으로 억울했다. 이 울울해진 판에 유종호의 <회상기>를 보았다. 저자가 소년 시절에 겪은 66년 전의 한국전쟁기 회고였다. 이 책을 유심히 본 것은 나와 비슷한 세대로 같은 충청도의 지방도시에서 골육상쟁의 전쟁을 어떻게 겪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란을 당한 자리와 사정에 따라 6·25는 매우 다르게 치르게 될 것이지만, 당시 “경험해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가 주먹 쥐고 추파를 던지며 무섭게 달려든다는 느낌”을 가진 그와 나의 차이는 세 살 차이 이상으로 뜻밖에 컸다. 그는 중학생이었고 생활에 대한 약간의 책임감과 강제입대당할 우려를 지고 있었지만 나는 책임질 것 없는 막내며 초등생이었다. 모두가 공포와 궁핍으로 겪은 가장 고통스럽고 곤혹스러운 그 시절을 내가 낭만적으로 회상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송구스럽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해 7월, 반동도 부역도 할 겨를 없는 자영업자인 부모님의 다행한 결정으로 우리는 시집간 지 얼마 안 된 큰누님을 바라 일찍 부산행 기차를 탔고 덕분에 공습도 전투도 못 보고 인민군가도 모르는 대신, 초량 언덕바지 셋방에서 창밖으로 낮에는 멀리 오륙도가 점점이 찍힌 수평선을 바라보고 밤에는 참전국 선박들의 아름다운 선등으로 환상적인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 대가를 치르듯이, 전쟁에 큰형님이 전사한 것은 2년 반 후였고 내 낭만적인 회상에 책임 없는 자책감으로 함부로 말 못할 멍자국이 찍힌 사건은 10여년 후에 겪는다. 전방의 군단사령부 공보실 사병으로 근무하는 중 6·25 몇주년 특집 취재차 일본 신문 기자 두엇이 방문했다. 최전방을 보지 못한 나는 이참에 ‘구경’ 삼아 따라갔고 오피(OP·전방관측소)에서 멀리 남방한계선 너머의 북녘 땅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저쪽 땅의 산과 들판에도 햇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는 것을 아득한 마음으로 눈 속에 담으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안타까운 경외감을 실감하고 귀대하는 지프차 라디오에서 “포 사격훈련장 인근 주민 여럿이 때아닌 실제 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보도를 들었다.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일본 기자들을 위해 이미 끝난 훈련이 다시 실시되었고 금지된 탄피 수집에 나선 주민들이 이 과외의 사격으로 희생된 것이다. 이 참담한 뉴스에 대해 나는 누구에게도, 어떤 말도, 감히 할 수 없었다. 한 해 후, 수습기자로 경찰서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어느 오후 나는 서울 부암동 어느 집에 가서 사진을 구해 오라는 데스크 지시를 받았다. 겨우 찾아 들어간 한옥의 그 댁 마루에서 아주머니 몇 분이 뭔가를 나눠 보며 즐거운 목소리들로 수선스러웠다. 그 밝은 자리에 슬며시 끼어들며 보니, 하필 막 배달된 아들의 편지와 사진들을 읽고 보는 중이었다. 내가 사진 두어장을 주머니에 챙기자 누구냐,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나는 움츠러든 개미 목소리로 “월남파병 국군의 첫 전사자…”라고 채 맺지 못한 말로 뺑소니치면서 그 어머니이지 싶은 분이 댓바람으로 마당으로 몸을 던지며 통곡을 터트리는 장면을 등 뒤로 보았다. 몇 주 후 유가족에게 그 사진을 돌려드릴 때 나는 감히 어떤 말로도 위로의 뜻을 드릴 수 없었다. 맏아들 발터는 수용소행을 피해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다량의 모르핀을 먹고 자살했고, 아우 게오르크는 빈민가 의사로 봉사하다 수용소 철망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며, 여동생 도라는 뛰어난 사회학자였지만 스위스에서 청소부로 일하다가 암으로 죽은, 유태인 세 남매가 40대로 수명을 다했던 <벤야민, 세기의 가문>을 추적한 헤예는 예술철학자 발터의 말을 인용한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억은 유명한 사람들의 기억보다 존중받기 어렵다. 그러나 역사의 구조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억들에 바쳐진다.” 포 사격장 주민들, 월남전의 첫 전사자를 회상하며 든 내 무력한 자책감은 구의역의 젊은 노동자, 정희진이 지목하는 ‘전단지 돌리는 사람’ 등 “개돼지”로 취급당하며 그 존재감이 찢기고 있는 오늘의 숱한 루저들과 엑스트라들 얼굴로 번지며, 그분들과 그분들이 일군 역사에, 아무 말 못 드리고 기억의 무모한 부끄러움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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